1976년에 경제, 사회적으로 낙후됐던 동구권국가 헝가리에서 21세의 젊은 대학생 ‘카탈린 카리코(Katalin Kariko)‘가 mRNA(messenger RNA; 전령리보핵산)연구에 투신했다. 그리고 고난으로 점철된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2020년 11월, 미국의 ‘화이자’와 독일 ‘바이오엔테크’가 공동개발한 COVID-19 mRNA백신 BNT162b2가 FDA승인을 받았다. 이 백신의 개발주역은 다름 아닌 ‘카탈린 카리코’ 박사였다. 미국 시사월간지 ‘애틀랜틱’은 “이처럼 ‘카탈린 카리코‘의 ’인공 mRNA아이디어’가 실행될 때까지 많은 과학자들이 직업과 경력을 망쳤고 여러 회사가 파산했지만 그는 기어코 mRNA백신을 만들겠다는 투지를 불태워 왔다.”고 말했다. 인체면역세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mRNA가 들어오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황으로 인식하고 감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스파이크단백질’에 대한 중화항체를 만들어낸다. ‘애틀랜틱’은 그러한 mRNA의 작용원리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약회사는 바로 우리 몸 안에 있다”라고 논평했다. 이처럼 수십 년 간의 기초연구 위에 쌓인 mRNA
내가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온 후 어느새 19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 때 처음으로 입주했던 새 아파트였는데 베란다 정면의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남쪽으로 관악산이, 그리고 동쪽으로는 정감 넘치는 남산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비나 눈이라도 내리고 나면 나지막한 연무에 허리를 감싸인 산들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했다. 멋진 능선으로 옹위된 관악산 연주대 위로는 형형색색의 비행기가 은익(銀翼)을 번쩍이며 쉬지 않고 날아들고 밤이 되면 동쪽의 남산타워 오색등이 별처럼 빛났다. 이렇게 아름답고 유서 깊은 한양(漢陽) 3대 명산이 간직한 조선 초기의 비사(祕史)를 살펴보자.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한 이듬해인 1393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와 함께 계룡산 언저리인 신도안(新都安)을 시찰하고 도성후보지로 선정한 다음 성곽축조 공사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개국공신인 하륜(河崙)의 강력한 반대로 신도안 천도를 취소하게 된다. 하륜은 한강이 무악재(母岳山)를 배경으로 연희동 일대의 평야를 아늑하게 감싸 안고 흐르는 지형이 마음에 들어 한양 천도를 주장했다. 그러자 태조는 개국 일등공신인 정도전과 무학대사, 하륜의 의견을 종합해 한양을 도읍지로 정
2000년 1월 1일자 ‘치의신보’ 제 11면에 게재된 본인의 시론 ‘새 천년의 지평에서’를 회고한다. “세기의 기원이 비록 종교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뿐이고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를 바 없다 할지라도 또 한 세기는 오늘부터 새로이 열렸다.....이토록 과학화되고 정보화된 미래의 모습에서 우리는 홀연히 피어나는 새로운 진리와 이성의 실체를 본다.....개개인의 도덕과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진실한 사랑과 행복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며 희망과 열정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 진정한 인본주의 시대를 여는 일, 즉 ‘테크노 휴머니즘’의 실현이야 말로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기대와 우려와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새 천년의 여명은 밝았다.” 그 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다는 만 21년의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갔다. 새로운 세기에 걸었던 기대와 신비로움은 예기치 못했던 온갖 사회적 소용돌이의 굴레에 갇히고 크고 작은 우려들만 더욱 부각되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지난날의 인간사는 언제 어디서든 성실하게 노력하면 누구나 성취를 누릴 수 있는 구도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열심히 씨 뿌리고 가꾸어도 ‘거두어 나누리라’가 아니라 ‘나누어 거두리라’가 정답으로
동정호를 지나치니 삼국지의 본향인 형주고성(刑州古城)이 다가온다.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였던 형주 시내 입구에는 거대한 관우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높이가 한 20m쯤 되는 것 같았다. 적벽대전 후 관우가 주둔했던 형주성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으며 삼국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아직 석회가 개발되지 않아 쌀로 떡을 쪄서 모래와 섞어 시멘트처럼 벽돌 사이를 채우고 성벽을 쌓았다. 그래서 나중에 벌레가 먹어 수시로 보수공사를 했다고 한다. 촉(蜀)과 오(吳)는 힘을 합쳐 적벽대전을 승리로 장식했으나 서로 형주를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였다. 형주는 장강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중원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다. 처음엔 촉의 영토였던 형주는 기습작전으로 오의 수중에 떨어지고 관우가 최후를 맞았지만 이후 60여 년간 서로 싸운다. 점점 강해지는 위(魏)를 앞에 두고 싸움을 계속하던 촉과 오는 차례로 멸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형주를 지나 만 하루를 더 나아가니 2011년에 완공되었다는 거대한 삼협댐(산샤댐)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 삼협댐은 높이가 130여 미터에 이르는 낙차를 극복하기 위해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다섯 개의 갑문을 거쳐 배가 상류로
구화산을 거쳐 만 하루를 더 상류로 헤쳐 가니 황학루, 악양루와 함께 중국 강남 3대 누각 중의 하나인 등왕각(滕王閣)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등왕각은 당 고조 이연의 22번째 아들이자 당태종(唐太宗) 이세민의 아우인 이원영이 그 지역 목사로 봉해져 부임한 후 8층으로 지은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강변 누각이다. 첫 건축 후 29차례의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이원영의 후임 목사였던 염백서가 베푼 연회에 참석한 시인 왕발(王勃)이 지은 시가 장원으로 뽑혔다. 왕발은 수나라 말의 유명한 수학자 왕통의 손자로서 당나라 초기(初唐) 4걸(傑)이라 불리는 당대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약관 1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산랑(朝散郎)이 되었고, 그 후에 괵주참군(虢州參軍)을 지냈다. 왕발은 너무나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참신하고도 건전한 정감을 노래해 성당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고 특히 7언절구(七言絶句)에 뛰어났으며 시문집으로 《왕자안집(王子安集)》 16권을 남겼다. 그는 불과 26세였던 676년 8월, 교지땅(交趾令)에 좌천된 부친을 찾아가다가 배에서 떨어져 장강에 빠져 죽었다. 여기에서 당시 왕발이 염백서에게 올렸던 <등왕각서(滕王閣序)&
나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하지만 군의관을 마치고 처음 치과의원을 개업했던 1986년까지 해외여행이라곤 꿈도 못 꾸었다. 개업 이듬해에 가까웠던 친구 부부와 태국 파타야를 다녀온 것이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물론 그 전에 고등학교 수학여행지와 신혼여행지로 일종의 해외(?)인 제주도에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고등학생 때의 제주도 수학여행은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44년 전 어느 가을날이었다. 목포에서 제주를 왕래하던 여객선 ‘가야호’가 제주에서 목포로 돌아오던 중에 기관 고장으로 동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마도 추자도 근해였던 것 같다. 600명이나 되는 우리 일행을 싣고 배는 정처 없이 섬 사이를 헤집으며 떠다녔다. 몇 시간을 파도에 흔들리며 떠돌자 모두가 심한 뱃멀미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날이 어두워진 후 출동한 해군함정에 의해 다시 제주항으로 예인된 다음 날 새벽녘까지 온통 공포와 고통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아마도 ‘세월호’ 사건의 전주곡은 아니었나 싶다. 1987년의 첫 태국 해외여행 이후 지금까지 30년 넘게 남아메리카를 제외하고 세계 곳곳을 두루 다녀왔다. 특히 ‘대한영상치의학회’를 따라 인도와 남아프리카 일대를 여행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