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망했다!’ 2019년 1월 19일, 한국에서 통 보기 어려운 폭설을 기대하며 찾은 설국의 본고장 일본 니가타 공항에 보슬비가 내린다. 기상예보를 체크하며 설마 했는데, 야속하게도 예보는 정확했다. 필자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일행 20여 명의 눈빛도 빗줄기 속에 흔들린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집을 나섰으면 매 순간을 즐겨야 하는 것이 여행자의 숙명이기에 대절버스에 짐과 몸을 실고 공항을 떠났다. 이토 저택 주심도리와 핫카이산 유키무로(雪室) 니가타는 소설 ‘설국’으로 일본에 최초의 노벨문학상(1968)을 안긴 가와바다 야스나리(1899~1972)의 고장이다. 우리여행의 일정도 야스나리가 소설 ‘설국’을 집필했고, 그 소설의 실제 무대가 되었던 에치고유자와 지역의 다카한(高半) 료칸 주변으로 집중되었다. 에치고유자와까지는 거리가 꽤 되어서 중간에 몇몇 경유지를 추가했는데, 그중 니가타의 최대 지주였던 이토 가문의 저택이 인상적이다. 대청마루 앞 큰 정원은 교토의 어지간한 사찰정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정성스럽다. 무엇보다 끊이지 않고 33m를 이어가는 주심도리(지붕을 받치기 위해 창문 위로 길게 이어지는 부재) 가 놀라웠다.
일본에서 눈(雪) 많이 오는 고장은 사람 사는 마을 기준으로 3~4m나 쌓인다. 강설량이 30m를 넘어야 이정도 두께가 된다니 그 양이 잘 어림되지 않는다. 그만큼 그들은 눈에 대한 대비도 철저하다. 심설산골 따듯한 료칸 안에서 창밖으로 밤새 하염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보면서도 다음날 버스타고 놀러 다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현지민에게는 끝없이 퍼붓는 눈이 큰 일거리다. 지붕과 길에 쌓이는 눈을 매일 치우지 않으면 금방 고립된다. 일본 편의점에서 만난 주민에게 ‘이렇게 눈 많이 내리는 아름다운 곳에 사시니 참 좋겠다’라고 했다가 ‘한 번 살아보라!’는 핀잔 엇비슷한 반응에 머쓱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6년 째 일본의 눈(雪)을 여행으로만 만났던 필자의 편협한 기억 속에 그들의 눈은 ‘차분함, 따듯함, 설국’이란 키워드로 기억될 뿐이다. 4박5일, 대각선 파노라마 횡단여행 지난겨울은 일본 홋카이도로 설국여행을 떠났다. 일본 최북단섬이지만 면적은 남한의 78%에 달한다. 위도로는 러시아 남부와 이어지지만 해양성기후로 겨울 평균기온이 서울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칼바람이 불 때는 전혀 섭섭지 않을 만큼 확실하게 매서움을 날린다. 걷는 게 직업인 필자는
남쪽의 금강산이라는 별칭이 잘 어울리는 해남 달마산, 산세의 수려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미황사라는 아름다운 사찰이 함께하여 평소에도 찾는 발걸음이 많다. 이곳에 1년 전쯤 ‘달마고도’라는 그럴듯한 걷기여행길이 개통됐다. 사실 그럴듯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잘 생기고 어여쁜 길이다. 좋은 길 정보에 촉각을 세운 걷기동호인들은 벌써 17.5km에 달하는 달마고도를 섭렵했고, 지금은 일반 관광객들이 가세하는 형국이다. 달마산 중턱을 한 바퀴 돌아 걷는 이 길을 모두 걸어도 좋겠지만 미황사 주변만 다녀와도 먼 걸음한 값은 톡톡히 받는다. 사람의 길, 사람 손으로 만들다 달마고도는 오가는 사람이 교행하려면 슬쩍 옆으로 비껴서야할 정도로 조붓하다. 그래서 걷는 맛이 어느 길 보다 좋다는 찬사를 받는다. 사람들은 넓고 빠른 길을 원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넓은 길은 보통 일을 하러가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 빠르게 이동하는 길이다. 하지만 여기에 소개하는 길은 느리게 걸으며 쉬기 위한 길이다. 그래서 좁고 우둘투둘한 흙길로 이어진 이 길이 제격이다. 달마고도가 감칠맛 도는 길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걷는 길은 사람 손으로 만들어야 좋다’는
몇 년 전 걷기여행길 전문가들과 길 컨설팅으로 충남 부여의 사비길을 11월 하순에 걸었다. 이전에도 여러 번 걸었던 곳이어서 별다를 것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부소산성의 때늦은 화려한 단풍에 감탄을 하고 말았다. 동행했던 일행 중에는 부여 출신의 여행작가도 있었는데, 그분도 부소산성의 늦단풍이 이리 좋을 줄 몰랐다며 연신 셔터를 눌렀던 기억이 있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을 서기 660년까지 120년 간 지켰던 최후의 보루이자 왕궁의 후원이기도 했다. 걷기 좋은 숲 산책로를 5km 넘게 보유한 부소산성은 패망한 나라의 왕성이어선지 언제 걸어보아도 검박하고 소슬한 맛이 독특한 아취를 그려낸다. 부소산성의 화려한 가을단풍은 이런 쓸쓸한 느낌과 대비를 이루며 더 깊이 스며든다. 부여 사비길 따라 역사순례 부소산성만 걸어도 그 자체로 훌륭한 걷기여행이자 단풍걷기가 되지만, 걷기여행길을 통해 영역을 조금만 확장하면 부여 사비길이 등장한다. 사비길은 부여가 가진 다양한 백제역사자원을 엮은 길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정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42곳 중에서도 첫 손에 꼽는 대표적인 역사탐방로다. 이 길은 2015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백제역사지구
세계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 대표 전통한옥마을인 하회마을은 전국 최고라는 유명세를 뒤따라온 관광지화의 쓰나미 속에 본래의 정신을 잃어간다는 혹독한 말을 듣기도 한다. 매표소가 있는 마을입구부터 전동차를 타고 돌아보라는 호객행위가 시작되고 국적을 알 수 없는 조악한 물건들로 좌판을 벌린 노점들과 현대화된 상점가는 ‘하회마을은 점찍고 가는 것만으로 족하다’라는 냉혹한 평가를 종종 불러낸다. 하회마을 매표소에서 줄 서서 타는 무료셔틀버스를 이용해서 마을만 휙 돌아보고 나오는 관람객들은 이러한 실망감을 안고 돌아가기 십상이다. 하지만 하회마을과 숲길 넘어 병산서원을 잇는 유교문화길 2코스 ‘하회마을길’을 두발로 온전히 걸어본다면 우리 전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의미있는 여행길이 될 것이다. 마을입구부터 낙동강 따라 오솔길 걷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된 유교문화길 2코스 ‘하회마을길’은 본래 안동한지에서 출발하지만 보행쾌적성이나 여행만족도를 위해서 하회마을 입구부터 걸어서 병산서원에서 마무리하는 것을 추천한다. 총 걸리는 시간은 마을을 어느 정도 둘러보느냐에 따라 가감되지만 대체로 3시간에서 4시간30분 정도 잡으면 된다. 스마트폰
이번에 소개하는 루트는 일반인이 갈 수 있는 현존하는 서울의 마지막 별천지를 지나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먼저 오성대감으로 알려진 백사 이항복이 경치에 반해 별장을 지었다는 북악산 아래 백사실계곡을 걷는다. 그리고 만나는 곳은 세종의 셋째아들로 꿈에 본 선경(仙境)을 안견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몽유도원도’라는 걸작을 남긴 안평대군이 그 꿈에 보았던 곳과 경치가 닮아서 집을 지어 머물렀다는 인왕산 자락 무계정사터의 무계원이다. 마지막은 아름다운 주변 경치로 흥선대원군이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으로부터 소유권을 빼앗다시피 넘겨받았다는 석파정이 장식한다. 세검정서 시작해 백사실계곡 거쳐 창의문으로 걷기의 시작은 종로구 홍지동의 세검정 버스정류장부터가 좋겠다. 복원한 세검정 정자에서 너럭바위를 씻어내며 흐르는 홍제천을 바라보자. 세검정은 이름대로 검을 씻었다는 곳으로 과거 군사훈련장소였다는 설과 인조반정 때 반군들이 광해군의 폐위를 논하고 검을 씻었다는 설 등이 있다. 작명의 연원이 무엇이든 속이 후련해질 정도로 시원한 물줄기가 꽤 볼만하다. 크게 굽어지는 홍제천을 따라 상류로 향하면 백사실계곡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안내하는 안내판들을 볼 수 있다. 입구를 놓쳤다면
바람이 분다! 파도 위를 날아 육지에 상륙한 시원한 바닷바람에 강릉의 솔향기가 더해진다. 해변을 따라 길게 띠를 이루며 4km 정도 이어지는 해송숲은 강릉을 커피의 고장으로 올려놓은 안목해변(강릉항)에서 북진한다. 강릉을 대표하는 걷기여행길인 강릉 바우길 5구간이 바로 이 길을 지난다. 바우길 5구간은 동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해파랑길 770km 50개 코스 중에 39코스와 노선이 정확히 겹치는데, 걷기여행길 방문객 규모면에서 동해안 톱클래스에 들어가는 명품코스로 정평이 나 있다. 바우길 5구간은 사천진항 출발해 남항진해변 솔바람다리 부근까지 약 16km를 남진(南進)한다. 하지만 코스 후반부에 볼거리와 먹거리가 집중되므로 코스 종점인 남쪽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걷는 것이 더 좋다. 남쪽 출발점인 남항진해변에서 걷기를 시작한다면 16km를 다 걸어도 좋지만 오래 걷기에 익숙지 않을 경우 출발점에서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까지 7km만 걸어도 핵심은 거의 지나는 셈이니 걷기부담을 줄여 걸을 수 있다. 솔바람다리 건너 커피향 그윽한 안목해변으로 남쪽에서 걷기를 시작할 곳은 바람을 형상화하여 디자인한 남항진해변의 솔바람다리다. 남항진해변과 강릉항 사이를 관통해 바다와
산수(山水) 좋은 홍천의 여러 걷기여행길에서 걷기꾼들이 단연 첫손에 꼽는 길은 용소계곡 트레킹길이다. 안 걸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걸어본 사람은 없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용소계곡 트레킹길은 상당한 만족감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소계곡은 주말에도 걷는 이들이 많지 않아 한산한 편이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코스 시작점과 종점을 연계하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그러다보니 대절버스를 이용한 단체 이용자가 많은 편이고, 개인적으로 가더라도 자가용 두 대를 이용해 한 대를 종착점 주차장에 두고 다른 한 대로 시작점까지 간 후 걷는 방법을 택하곤 한다. 필자가 용소계곡을 처음 찾았던 10년 전에는 오지 트레킹 코스로 첫 발을 떼었지만 몇 년 전 용소계곡에 대한 전체적인 탐방로 정비가 이뤄지며 걷기가 한결 편해지고 길찾기도 쉬워졌다. 예전에는 바짓가랑이 걷고 수심 얕은 계곡을 건너면서 트레킹을 마무리했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대형 현수교가 놓여 건너기는 편해졌으나 예스런 맛은 조금 줄어들었다. 에메랄드빛 신비로운 소(沼)의 환상 릴레이! 계곡 시작점인 내촌면 광암리 부근에 트래커들을 위한 주차장이 최근 마련됐다. 이곳에 주차하고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좁은 포장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