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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4)혈액형


혈액형에 대한 나의 철학이
어느정도 정립된 시기는
2002년경 이었던 것으로 기억…


“이전 치과에서는 왜 퇴사하셨나요?" “네. 잠시 몸이 안 좋아서…. 이젠 건강해요."
“네, 근데 혈액형이 어떻게 되세요?" “네? 혈액형도 말해야 하나요?" “그냥 참고만 하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O형 인데요, 근데 친구들이 A형이라 말하라던데.."


며칠 전 퇴사하게 된 위생사 김모양의 공백을 메우느라 오늘도 면접이 이어진다. 이제 웬만큼 관상학에 대한 일가견이 생겼다고 자평(自評)하지만 오늘도 혈액형에 대한 마지막 질문으로 이어졌고, 상대방은 영 못마땅한 눈치다. 그러나 필자의 손에 쥐어진 이력서에는 "O"와 "?"라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는 암호가 종이를 접는 순간에 절묘한 타이밍으로 기록된다. 이렇게 기록된 암호는 원장실 문이 닫힌 후에도 어느 정도 결정이 내려질 때 까지는 계속 참고사항으로서 활용된다.


오늘의 면접자는 경력에 비해 업무능력이 우수한 것으로 판단되고, 단정한 용모에, 적정한 급여를 요구하므로 일단 채용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한가지 참고할 부분은 O형 특성상 기존 직원과 원장과의 감성적인 부분에서 적잖이 충돌할 가능성이 있고, 까다로운 필자가 요구하는 섬세한 어시스트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도 있을 거라는 걱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또 다른 유력한 채용후보자의 혈액형이 A형인 점이 결정적으로 고려돼 최종 채용키로 한다. 여기서 나머지 직원과 필자의 혈액형은 A형 임을 밝혀 둔다. ‘A형만 4명이면 내가 제명(命)에 못살지, O형이나 B형이 필요해." 참고사항을 적절히 활용한 공평한 채용이었다고 필자는 자기정당화에 성공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ABO식 혈액형은 오스트리아 병리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에 의해 분류법이 개발됐다. 1930년경에 개발된 이래 70여 년간 수많은 생명을 수혈로 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혈액형에 의한 수혈법의 확립 덕택이다. 노벨의학상에 빛나는 이 위대한 업적이 필자에 의해 동양사상에 입각한 관상학으로 효용가치가 절하되는 것에 대해 필자도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부디 너무 욕하지는 마시길 바란다.


혈액형에 대한 나의 개똥철학이 어느 정도 정립된 시기는 한창 맞선으로 주말을 소진하던 2002년경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색한 분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한두 번 물어본 게 혈액형이었고, 상대방의 성격과 행동을 연관시켜 보는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막연하게나마 각각의 정형화된 특징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해 여름, 드디어 혜안(慧眼)을 가진 한 여성과의 맞선자리에서 혈액형에 대한 논리적 분석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에 이르렀다. 당시 그 여성은 ABO식 단순분류를 넘어서 AO, AA, BO, BB, 이런 식으로 잠재된 항원, 항체에 따른 명확한 분석을 나에게 명쾌하게 설명해 줌으로써 나의 논리적 미숙함을 일단락시켜 주었다.


오늘도 필자의 아침 밥상에는 밑바닥이 까맣게 탄 떡갈비가 올려져 있다. 작은 일에 구애 받지 않는 OO형 혈액형을 가진 집사람이 만든 것이므로 아무런 불만이 없다. 출근해 보니 정성껏 만들어 놓은 임시치아가 책상에 놓여있다. AA형 혈액형을 가진 이모 위생사의 작품임에 틀림없다. 흡족한 마음에 다음달 월급을 좀 올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커피잔을 드는데 옆에 놓인 쪽지에 눈길이 간다. ‘원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실수가 많더라도 화내지 마시고 가르쳐주세요." 오늘 첫 출근한 OO형 위생사의 사전포석이다. 이건 전형적인 BB형의 행동양식이다. 살다 보면 가끔씩 예외는 있는 법이다.


매일 반복되는 진료시간인데 오늘은 뭔가 좀 다르다. 늘 있어왔던 "석션 피해서 프렙하기"도 없었고, 일어날 때 라이트에 머리를 부딪히지도 않았다. “석션!", “리트렉션!" 같은 외마디 절규도 없었다. 최근에 이렇게 섬세한 어시스트를 받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무래도 OO형에 대한 나의 개념정리에 수정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돼 필자는 혜안(慧眼)을 가진 그 여성에게 다시 자문을 구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