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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 기행(22)] 청도 운문사

울창한 숲·수정같은 계곡 피서지 제격


천혜자원 덕분 등산·삼림욕 함께 즐겨고속도로를 경산IC를 벗어나 자인, 남산을 지나면서 대추나무가 밭마다 가득하다. 나무들은 지붕을 가리고 숲 속에 마을이 있는 듯 느긋한 맘이 절로 우러난다. 이 땅을 여행한다는 것은 ‘길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즐거운 여정이 된다. 다양한 풍경들이 연이어 나타나며, 그 풍경들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이 계절의 풍요로운 변화다.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자연을 닮았다. 아기자기한 풍경들을 차창으로 스치며 운문댐을 지나니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파란 호수가 하늘과 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잠잠히 누워있다. 나는 인공호수를 바라 볼 때마다 그 속에 잠긴 마을이 그립다. 상실된 고향의 향수 같은 것이랄까? 한때는 번성했을 마을엔 물고기들만 저 세상이 됐다. 벚꽃 가로수를 심어 이 나무들이 좀 더 자라면 근사하겠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맑고 시원한 계곡을 따라 여름에 핀다는 예쁜 메꽃이 길을 안내한다.


내가 청도 운문사를 처음 만난 건 대학 3학년 학술답사를 준비하면서다. 운문사 앞 허름한 여인숙에서 하룻밤 묵고 이른 아침 운문사로 향했다. 밤새 눈이 내렸다. 입구 솔밭에는 푸른 솔향기와 하얀 눈이 동양화의 여백처럼 기묘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직 인기척이 없는 길. 그 길을 잊지 못한다. 운문사 소나무숲은 지정되지 않는 문화재다. 내 마음은 이미 그때부터 문화재로 등록하고 있었다. 소나무를 무척 좋아했던 내 친구는 “나 죽으면 저 소나무로 다시 태어 날 꺼다!”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때부터 난 소나무 곁을 지날때면 한번 더 쳐다보곤 했다. 절은 참으로 조촐했다. 스님들의 부지런한 손길이  경내의 눈을 이미 조심스럽게 치워놓고 있었다. 대웅전과 만세루, 삼층석탑이 겨울 손님을 그리며 겨울 풍경에 젖어 있었다.


운문사를 다시 만났을 때 운문사는 유명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여행자의 답사기에 운문사 새벽예불에 대한 극찬이 있은 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새벽예불을 보기 위해 관광버스들은 새벽에 들이닥쳤다. 그래서 입장료도 새벽부터 징수하고 있었다. 250여 비구니 스님들의 새벽예불 장엄은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은은한 불빛, 자연을 닮은 단청, 금색 부처는 빛을 발하고, 스님들의 독송은 망망 大海의 파도처럼 나를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스님들은 새벽 불청객이 얼마나 귀찮을까 싶어 죄송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매미소리 숲의 향기를 일깨우는 이 여름에 다시 찾았다. 소나무는 여전했고, 절 앞까지 진출해있던 음식점들이 입구 상가촌으로 옮겨져 호젓한 맛이 더 좋다. 솔향기가 코를 간질이는 길을 걸어 운문사에 닿는다. 막걸리를 마신다는 운문사 소나무는 여전히 우산같은 가지로 그늘을 드리우고, 평평하고 넓은 터에 당우들이 적당한 거리에서 각각의 역할을 하고 있다. 부지런한 어머니가 자녀들을 예쁘게 키우듯 스님들의 손길에 경내는 정갈한 자태를 잊지 않고 있다.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한 스님이 지금의 운문사 조금 못미처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득도하여 주변에 다섯 개의 갑사를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다섯 개의 갑사중의 하나가 운문사였고 신라의 원광스님은 이곳에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신라인들의 정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 초 태조 왕건을 도왔던 운문사는 왕실의 후광으로 사세를 크게 확장했고, 원응국사가 주석하면서 그 위세를 드높였다.


12세기말, 무신정권하 전국에서 농민과 천민의 항쟁이 이어졌다. 공주의 망이 망소이의 항쟁과 운문에서 일어난 김사미의 항쟁이 대표적이다. 운문의 김사미(김씨 성을 가진 사미승)는 초전의 효심과 연합하여 경상도 일대를 장악했으며, 중앙정부와 대결을 했다. 당시 운문사는 김사미의 세력하에서 모습이 어땠는지는 기록에 없다. 다만 농민항쟁이 끝나고 몽고의 간섭기로 들어가는 1277년 72세의 일연스님은 5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민족의 위대한 유산인 ‘삼국유사’를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