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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 기행(24)]부여 그 미완의 미로

“백제의 도읍지를 돌아보는 여행길은   그렇게 허망하다. 신라의 고도 경주와 같이 화려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접는게 낫다”


정림사지와 궁남지에서


내 여행길에서 부여는 늘 미완의 행로였다. 작심하고 떠난 길에서 돌아올때는 허전하고 씁쓸한 여운을 여행가방 가득 담고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부여에 대한 여행기를 쓴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고, 가슴속에서 터질 듯이 뿜어져 나오는 무언가 있지 않으면 쓰지 않으리라 마음먹기도 했다.
그런데 다녀오면 다시금 커지는 알 수 없는 허망함이 여물지 않는 여행기(旅行記)를 쓰도록 재촉했다. 백제의 옛 땅을 찾는 길은 그렇게 허망을 기대하며 떠나야 하는 서글픔이 있다.


650년이 넘어서자 백제는 희망과 절망이 교차 했다. 총명한 의자왕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백제 중흥의 군주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후 절치부심 기회만 엿보다 이때서야 신라에 대해 공세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이제 신라를 마지막까지 밀어붙여 원수를 갚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감으로 넘쳐났던 왕은 오히려 그것이 총명함을 가리고 자만심으로 가득 차게 했다. 충신 성충은 656년(의자왕 16) 유배지에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간했다.
“국제 정세를 보아하니 곧 큰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데, 수군은 기벌포(白江口)에서 방어하고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십시오.”


총기(聰氣)를 잃어버린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660년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불시에 받게 됐다. 당나라 수군은 기벌포를 넘보고 있었으며, 신라의 5만 군대는 명장 김유신의 지휘 하에 백제를 동쪽에서 침범하고 있었다. 왕은 유배 가 있는 흥수에게 다시 물었다. 흥수는 성충과 같은 말을 했다. 아첨의 무리들은 왕에게 아뢰었다.
“흥수는 지금 유배를 당해 왕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옳은 계책을 내어놓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말대로 한다면 반드시 큰 화가 미칠 것입니다.”


평소에 과단성 있기로 정평이 나 있던 의자왕은 이때만큼은 우유부단했다. 그러는 사이 이미 당군은 기벌포를 넘어 부여로 진격하고 있었고, 신라는 탄현을 넘었다. 계백이 정예군사 5000을 이끌고 나갔으나 중과부족이었다. 백제의 사비도성(부여)에서 나당연합군과 백제 방어군 20만이 격전을 치렀다. 웅장했던 사비도성은 순식간에 불타고 아비규환이 됐다. 백성들은 왕궁이 기대고 있는 부소산으로 도망쳤고, 왕은 금강을 따라 웅진(공주)으로 피신했다. 왕의 둘째아들 태가 힘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백성들은 적의 위협을 피해, 또는 저항하기 위해 밀리고 밀려 높은 바위 벼랑에서 금강으로 몸을 던졌다. 후세사람들은 이것을 낙화암이라 했다. 의자왕의 3천 궁녀가 뛰어내렸다고 해 이름 붙었다고 하나, 이것은 한낱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푸념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 해 ‘타사암’이라 했다.


백제의 도읍지를 돌아보는 여행길은 그렇게 허망하다. 신라의 고도 경주와 같이 화려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접는 게 낫다. 무참하게 멸망한 나라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화려했던 궁궐과 도성은 철저히 파괴됐고 남아 있던 것들 마저도 오랜 세월 무관심속에 사라져갈 뿐이었다. 살아 남아 옛 백제를 증언해주는 것이라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는 그날의 충격’과 ‘온갖 풍화에도 견딜 수 있는 몇몇 석조물’ 뿐인 것을.


옛 사비도성 한 가운데 부여를 상징하고 백제문화를 상징하는 정림사지와 그 안에 있는 5층석탑이 있다. 옛 백제 궁궐에서 바라보면 남쪽 정면에 있다. 도성 안에서 가장 규모가 있고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날마다 사비도성에 퍼지는 정림사의 종소리는 백제인들을 일깨웠던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 군대를 지휘했던 소정방은


“항차 밖으로는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는 요부(妖婦)를 믿어 형벌이 미치는 것은 오직 충량(忠良)에게 있으며 총애와 신임이 더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