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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기행(27)]홍성 김좌진·한용운 생가를 찾아서/마중할 줄은 알면서 왜 마중 받을 줄은 모르는가?

 


추위가 늦게 찾아온 이번 겨울은 늦도록 단풍이 유혹을 했었다. 겨울이면서 겨울 같지 않는 이 계절에는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마땅히 떠오르는 곳이 없다. 유명 여행지는 계절과 잘 어울린 곳이 대부분이라 신록도 단풍도 사라진 이 계절에는 어느 곳을 고심해 찾아간다 한들 휑한 가슴을 채워줄 곳이 많지 않다. 이런 계절에는 사람을 찾는 것이 좋다.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을 찾아가 인생을 배우고, 느끼고, 사랑하고 돌아오는 것이 좋겠다.


사람을 찾아가는 여정의 일번지는 홍성이 되겠다. 양반 중의 양반은 충청도양반이라 한다. 왜 충청도 양반이라 할까? 양반문화가 많기로는 안동이나 영양, 봉화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양반고을이라고 내세울 것이 없다. 부드럽고, 여유있고, 친근해서 그럴까? 그렇다면 아래 열거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고려의 자존심 최영, 고불 맹사성, 사육신의 성삼문, 임진왜란 이순신,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김대건 신부, 개화당의 김옥균, 김좌진 장군, 윤봉길 의사, 만해 한용운, 유관순 열사, 상록수의 심훈, 고암 이응로 화백….


이들은 충청남도 천안, 아산, 홍성, 예산, 서산, 청양, 공주 출신들이다. 충청남도에서도 바다가 깊숙이 들어온 ‘내포’라 불리는 고장 사람들이다. 뜻한 바 있으면 세상이 흔들어대도 굽히지 않고 이루어냈던 기개와 義로 말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분들이 아닌가? 양반이란 무엇인가? 조선시대 지배계층을 양반이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단순하게 평가한다면 그렇겠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그 중에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 의연히 떨치고 일어났는가?” 라는 평가항목이다. 위에 열거한 인물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을 내포지방은 탄생시켰으며 충청도 양반의 기세를 드높였던 것이다.
내포를 내표하는 고장 홍성에는 일제 식민지하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몸 바쳤던 두 거인이 있다. 백야 김좌진장군과 만해 한용운선생이다. 백야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해 헌신했으며, 만해는 국내에 남아 허물어져 가는 민족정신을 일깨웠던 분이였다.


백야 김좌진의 생가는 홍성IC에서 멀지 않다. 안면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곧 백야 김좌진, 만해 한용운 생가를 알리는 표지가 동시에 나온다. 백야 김좌진은 1889년 당시 명문가이자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가노를 해방하고 재산을 나누어 줄 정도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개화사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고향 홍성으로 돌아와 가산을 정리해 학교를 세우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11년 군자금 모금운동을 하다 일제에 발각돼 2년6개월간 투옥됐다.

 

이때 독립운동에서 한번의 실수는 용납되지 않음을 알고서 만주로 옮겨 가 본격적인 무력항쟁에 돌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를 훈련해 정예의 부대를 양성했고, 군대의 성격에 맞는 무기를 갖추는데 노력했다. 김좌진, 홍범도, 최진동 등이 이끄는 독립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계곡 깊숙이 일본군을 유인한 독립군부대는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일본군 3300여 명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섬멸 된 인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지만 일본으로서는 대단한 타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때 장군의 나이 약관 31세였다. 우리 무장독립투쟁사상 홍범도의 봉오동전투와 함께 가장 빛나는 개가로 꼽는다. 이 후 일본군의 치열한 보복작전으로 러시아령 자유시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그동안 시베리아에서 적군에 협조해오던 한인부대인 자유대대·사할린부대와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통합부대의 주도권 장악을 노래는 두 부대의 싸움에 휘말려 수백 명이 죽고 포로가 되는 참변(자유시참변)을 당했다.


다시 만주로 돌아온 김좌진 장군은 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무관을 양성했고, 한족연합회를 결성해 주석으로 취임해 황무지를 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