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6 (목)

  •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문화답사기행(32)]부석사/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부석사

 

이번 여정은 소백산 너머 영주 땅 부석사로 향한다.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알려져 있다는데 함정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불국사 가 보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가장 모르는 곳이 불국사이기도 한 것처럼 부석사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건축가가 뽑은 가장 아름다운 절집, 목조건축 중 최고의 건축 무량수전 등의 수식어로 소문나 있는 절집이기도 하다.
부석사를 이해하기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부석사를 창건했던 창건주 의상대사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의상과 원효는 동기간이다. 물론 원효가 의상보다 나이가 서넛 많았다. 일찍이 큰 꿈을 품고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첫 걸음에서는 고구려의 방해로 발길을 돌렸지만 두 번째 유학길에 올라 지금의 평택 땅 즉 지금의 서해대교 인근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에 의하면 무덤 속에서 잠을 잤다고 되어 있다. 하긴 옛날 무덤은 굴식으로 된 돌방무덤이었으니 훼손된 무덤이 있었다면 가능했겠다. 원효는 목이 말라 해골에 든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어 중국행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와 백성들에게로 들어갔다. 원효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미루기로 하고 의상의 유학길로 돌아가 보자.


의상은 도당(渡唐)하여 산동성의 한 신도집에 머물때 선묘라고 하는 낭자가 의상에게 반해 그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스님의 굳은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알자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스님께 귀명하여 스님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소원을 세웠다. 의상은 지엄의 문하(門下)에서 화엄학을 배웠다. 그러나 당시 문무왕의 동생으로 당나라에 있던 김인문의 부탁을 받고 급거 귀국(문무왕 16년. 676년) 하게 된다. 당나라의 신라 침공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귀국할 때 선묘의 집에 잠시 들러 사의를 표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묘는 집에 없었다. 뒤늦게 선묘가 이 사실을 알고 선창으로 뛰어왔으나 이미 신라로 배는 떠나고 말았다. 선묘는 스님을 위해 마련했던 옷가지와 집기가 든 상자를 바다에 던지고, 내 몸이 바다의 용이 되어 스님의 무사 귀국을 돕게 해달라고 하며 역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문무왕에게 당나라 침공계획을 알리고 그 길로 왕도를 떠나 5년동안 통일된 신라를 주유하며 피폐한 백성들의 삶을 불법(佛法)에 귀의케 하였다. 바다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에겐 해수관음에게 귀의토록 하기 위해 낙산사 창건하였다. 이미 의상은 당나라로 건너가기 전에 산중 사찰 불영사(울진 소재)를 창건한 바 있었다. 그리고 부석사를 창건하게 되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을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교(大乘敎)를 포교하니 영감(靈感)이 많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부석사 창건은 왕명에 의해 창건되었음을 볼 수 있다. 부석사를 창건하고자 했을때 사교의 무리가 있어서 방해를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집 채 만한 바위가 둥둥 떠서 위협을 하니 사교의 무리가 모두 흩어졌다. 선묘가 바위의 조화를 부린 것이었다. 부석사(浮石寺:뜬바위절)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지금도 부석사 무량수전 뒤에 그 바위가 있다. 조선영조시대 ‘택리지’를 저술했던 이중환이 이곳에 와서 ‘바위 밑으로 끈을 넣어 잡아당겨 보았더니 걸림이 없이 빠져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상과 선묘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는 송나라 찬녕이 지은 ‘고승전’에 나온다.


지금의 부석사와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의상이 창건한 모습이 아니다. 의상은 지금 부석사 조사당이 있는 자리에 조그마한 초막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손제자인 신림대덕의 때에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지금과 같이 조영되었다. 의상은 이곳에 있으면서도 나랏일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문무왕이 당나라를 축출한 후 서라벌에 큰 성을 쌓으려고 하자 곧 편지를 보내 질책한다. “왕이 바르게 백성을 다스리시면 맨 땅에 금을 그어놓고 성(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