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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 치과의사문인회](소설)황금벌판(1)/김영진

지지리도 못 살았던 어린 시절 아버지는
읍내 지주로부터 소작 열 마지기를
겨우 부쳐 먹는 빈농이었다


석씨의 등줄기에서는 연신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마을을 허겁지겁 떠난 것이 어슴푸레한 황혼이 밀려오던 한 식경쯤 전이었는데, 이미 어둠이 깃 든 무성한 숲 속에서 유일한 동반자인 아내 박씨와 함께 끝없는 고갯길을 오르자니 숨이 턱에 차고 으스스한 것이 영 불안했다. 스산한 갈바람소리는 참나무 잎새를 가르고 평소엔 그토록 듣기 좋게 명경지수 계곡을 울리던 낭랑한 물소리 역시 오늘따라 여간 음산한 게 아니었다. 등불도 없이 어두운 산길을 재촉하며 불안감에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수심에 잠긴 아내 박씨의 창백한 얼굴 외엔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별들이 총총한 맑은 밤하늘에 검붉은 초생달만 서산에 걸쳤고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그 어느 곳을 향하여 정처 없는 밤길을 재촉해야 했다. 어찌하여 마을엔 갑자기 인적이 끊겼고 어디쯤에서 반가운 사람들이 따뜻한 모닥불을 피워놓고 기다리고 있을지 도무지 짐작이 서질 않았다. 돌연 커다란 나무 밑둥의 시커먼 공간 사이로 한줄기 돌풍과 함께 새파란 두 개의 불꽃이 일었다.


진땀에 흠뻑 젖은 채 전율하던 석씨가 잠에서 깬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냉수를 한 대접이나 들이 키고 난 후 다시 자리에 누웠으나 잠은 오지 않고 지나쳤던 고달픈 인생의 여정만이 정적 속에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초저녁부터 끊임없이 귓가를 울리던 경쾌한 폭죽소리는 이제 좀 잠잠해졌지만 건너편 황씨네 산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높다란 무슨 캐슬 콘도미니엄의 휘황찬란한 야경은 아직껏 뭇 사람들의 즐거운 함성을 와-하고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여러 십년 이래로 석씨네는 이 동네 승언리 언저리에 자리한 초가삼간에서 살아왔다. 증조부께서는 구한말 높은 벼슬자리에 계시면서 도성 안에서 떵떵거리고 사시다가 나라가망하자 벼슬길을 내던지고 이곳으로 낙향하셨다는 이야기는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한테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이를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턱골 넘어 이 동네가 석씨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울창한 왕 소나무 송진 냄새에다가 황토 흙 내음까지 물씬 밴 관산 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지지리도 못 살았던 어린 시절, 아버지는 읍내 지주로부터 소작 열 마지기를 겨우 부쳐 먹는 빈농이었다. 재산이라면 할아버지 대에 마련한 턱골 야산자락의 밭 여남은 마지기가 있을 뿐이었다. 아침부터 논밭에 나가 뼛골 빠지게 일을 해도 이듬해 보릿고개에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다. 편도 이십 리 길을 걸어 학교에서 돌아오면 민둥산 너머 갯벌에 나가 조개나 게를 잡는 개발이를 하거나 운저리 낚시를 해서 부식거리를 장만했다.

 

운저리 낚시터는 주로 물이 썬 후 군데군데 만들어지는 둠벙이었다. 지금은 막혀진 진등개와 구정개 사이의 큰 뻘이 석씨의 놀이터이자 어장이었던 셈이다. 갯벌 위로 물이 들면 야산으로 소를 몰고 나가 풀을 뜯겼다. 소가 풀을 뜯는 사이 그는 깔을 베어 깔구럭에 담아 지고 어둑어둑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돌아오곤 했다. 소를 뜯길 때 풀밭에서 뽑아 먹던 삘기와 뚝 부러뜨려 껍질을 벗겨먹던 상큼한 고시는 심심찮은 군것질 감이었다.

 

하기는 초가을 산딸기나 아그배, 맹감, 어름, 칡뿌리 등도 좋은 군것질거리였지만 운이 좋아 산딸기를 많이 딸 때는 꼭 집으로 가져와 술을 담그곤 했다. 아버지께서 매우 좋아하시던 그 술은 복분자 술이라고 불렀는데 빨간 빛깔이 무척이나 예뻤다. 밭농사 철에는 고구마나 야채, 고추 등을 심은 밭에 나가 진종일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아버지는 논농사에 매달리고 밭농사는 어머니와 석씨 형제들의 차지였다. 황토 흙 고구마 밭에 쩔어 붙은 쇠비름과 바라구는 어찌도 억센지 뽑아내고 또 뽑아내도 금새 도로 무성해지곤 한다. 뜨거운 땡볕아래 고추 따는 일을 하다가 얼굴의 땀이라도 훔칠라치면 매운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