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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 치과의사문인회](소설)황금벌판(2)/김영진

 

 

2년간 재기의 발판을 닦은 후
이듬해 가을엔 박씨와 결혼을 하고
휴학했던 두 동생들도 대학에 복학시켰다

 


“아버님 아무래도 병환이 깊은 것 같으니 내일에는 읍내 병원에 가시지요.”
“아니다. 기침이 좀 나오고 밥맛이 통 없긴 하지만 묵은 감기인 것 같다. 좀 기다려 보자. 엊그제 건너동네 한약방에서 탕제를 지어다 달여 먹고 있으니 곧 좋아지겠지.”
“그래도 엑스레이라도 찍어 보셔야 될 것 같은데요?”
“병원비가 보통 비싸야 말이지. 네 동생 등록금도 곧 내야 되는데 한동안 이대로 지내고 보아야겠다. 그나저나 건너편 용재에 사는 박씨 딸과 혼담이 있었으니 이번 휴가 때 선이나 한 번 보고 가거라.”


“아휴, 제대 하려면 이 년이나 넘게 남았는데 벌써 선을 보다니요?”
“아니다. 박씨 딸이 부모 잘 모시고 착하기로 소문났으니 한번 보거라. 그만큼 부지런한 처녀가 없다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


“그 색시는 제 국민학교 이년 후배라서 예전부터 아는 사이지요.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내일은 아버님을 병원에 꼭 모시고 가보고 싶은데요.”
“좀 더 지내보고 영 안 좋으면 네 어미와 함께 가 볼 테니 걱정 말고 푹 쉬었다 가거라.”
석씨는 지금도 그때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가지 못했던 것을 발등을 찍고 싶을  만큼 후회한다. 아버지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맞선을 보았고 그 인연이 결국에는 결혼으로까지 이어졌지만 그 휴가 이후에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하는 비극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치 못했다. 다음 정기 휴가를 석 달이나 앞두고 극도로 쇠약해진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읍내 병원을 찾아갔지만 의사는 이미 손댈 수 없는 폐암 말기로 진단했다.


허깨비처럼 깡마른 아버지는 온종일 기침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며 잠도 앉아서 자야만 할 정도였다. 아버지에게조차 병명을 감추고 있던 소심한 어머니는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며 군대간 아들이 너무 충격을 받을까봐 그냥 좀 아프시다고 편지에 쓰곤 했다. 석씨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몇 차례에 걸쳐 중대장에게 특별 휴가를 신청했지만 번번이 보기 좋게 묵살 당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거짓말 같은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석씨가 군대를 제대할 때까지 먹장구름 속의 한줄기 빛처럼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은 바로 그 박씨 처녀였다. 동생들은 학비 때문에 휴학하고 집안 살림은 형편없이 기울어 갔지만 박씨는 거의 매주 석씨에게 편지를 보내며 후일을 기약하고 사랑을 고백했다.


틈틈이 어머니까지 보살펴드렸던 박씨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년간의 병영 생활을 더 버티어 냈을지 돌이켜 보면 막막하기만 하다.


고뇌와 인고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고 제대한 것이 늦은 겨울인 음력 이월이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그동안 부쩍 늙어버린 어머니와 고등학생인 막내 여동생만이 적막한 오두막을 지키고 있었다. 두 남동생들은 대학을 휴학하고 시내에서 막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했다. 그 해 봄, 석씨는 다시 소작을 얻고 농협에서 얼마간의 돈을 빌려 축사와 돈사를 새로 고쳤다. 이 년간 재기의 발판을 닦은 후 이듬해 가을엔 기다리던 박씨와 결혼을 하고 휴학했던 두 동생들도 대학에 복학시켰다. 그 해 스물여덟의 한창나이에다 천성이 부지런했던 석씨는 언제나 새벽 다섯 시면 자리에서 일어나 논배미의 물꼬를 보고 남들보다 앞서서 모판을 짜고 지심 매기를 했다. 해가 진 후에야 농토에서 돌아와 밤늦도록 집안일을 거두고 소 여물을 썰고 가축들을 제 새끼처럼 돌보았다.


석씨가 얻은 소작논은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논가에 연해서 갯벌이 펼쳐져 있고 진등개와 구정개 사이로 물이 썰면 뻘의 속등이 드러났다. 그리고 물이 들 때는 벌등이 조금씩 작은 섬으로 졸아들다가 갱 물 속으로 이내 사라져 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갯벌에서도 잘 자라는 빌레나 행자나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