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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기행(37)] 익산 미륵사지

미래의 부처 ‘미륵불’ 부활 익산 미륵사지

 

왕궁 터전 ‘왕궁리’ 복원 한창
1500년전 ‘서동요’ 귓가 맴돌아
동양 최대 미륵사 터만 남아
5층 석탑 ‘백제 우아미’ 뽐내

 

고대 사회에서 아내를 잘 만나 출세한 이가 있으니 고구려의 ‘온달’과 백제의 ‘서동’이다.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는 전래 동화처럼 이어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역사 속 이야기다. 이에 반해 서동에 대한 이야기는 단편적인 부분 즉 “서동이 신라의 선화공주를 꾀어와 부인으로 삼은 것” 외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서동요’라는 드라마를 통해 그 면모가 드러나지만,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드라마일 뿐. 정말 서동은 선화공주를 꾀어 결혼하였을까?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그 면면이 소상히 드러난다.

 

어머니는 연못가에 홀로 과부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못 속에서 용이 나타나 하룻밤 정을 통한 후 서동이 태어났다. 가난한 과부의 아들로 태어난 서동은 생계를 위해 마를 캐어 팔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비범했던 듯 하다. 비록 시골에서 보잘 것 없는 아이로 자랐지만 태생의 심상찮음에서 느껴지듯 그는 남달랐다.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머리를 깍고 서라벌(경주)로 들어갔다. 그러나 무슨 수로 공주를 만나겠는가? 그래서 그는 마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노래를 불렀다. 일종의 여론 조작용 ‘참요’인 것이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밤마다 서동서방을
안고 간다

 

노래는 서라벌에 쫙 퍼졌고, 진평왕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신하들은 강력히 공주의 품행을 문제 삼았고 급기야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왕후는 떠나는 공주에게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주었다. 공주의 유배길은 외롭고 힘들었다. 그때 서동이 길 위에 나타나 절을 하고는 함께 가기를 청했다. 공주는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알지 못했으나 그의 행실과 말이 싫지는 않았다. 연후에 몰래 정도 통했다. 그런 후에야 공주는 그가 서동이라는 것을 알았고, 노래대로 이루어지는 기묘한 체험에 흠칫했다. 노래를 퍼뜨려 백제로 데려왔으나 서동은 가난했다. 공주는 어머니가 준 금을 꺼내어 살아갈 궁리를 의논했다.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요”
“이건 금인데, 100년은 부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 마를 캐던 산에는 흙더미처럼 쌓여 있소”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보물입니다. 당신이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그 보물을 우리 부모님이 계신 궁궐로 보내드리는 것이 어떨지요?”
서동은 공주의 말대로 흙더미처럼 쌓여 있는 금을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의 힘을 빌어 신라의 진평왕에게로 보냈다. 후에 왕은 자주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이 되었다.


삼국유사에서 서동의 어머니가 살았던 곳을 궁의 남쪽 연못가라고 하였으나, 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인 궁남지는 ‘무왕 35년’에 만든 것이므로 맞지 않다. 서동이 왕이 된 다음 익산으로 자주 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승이 있는 용화산 사자사가 존재하는 곳은 익산이다. 그러므로 익산의 ‘마룡지’라는 연못가를 서동의 생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쨌거나 전설 속에는 진실이 함축되어 있다. 서동을 연못 속에 살던 용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는데 예부터 용은 ‘왕이거나 그와 비견될만한 인물’로 그려진다. 서동의 아버지는 백제의 법왕이다. 백제 성왕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의 아들 위덕왕이 45년간 왕위에 있었다. 위덕왕에게는 아좌태자가 있었지만 그의 동생이 왕위를 이었는데 혜왕이다. 그는 이미 늙어 있었으므로 2년밖에 있지 못했다. 그리고 혜왕의 아들 법왕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서동의 아버지다. 법왕도 2년간 왕위에 있은 후 죽었다. 죽은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급작스런 죽음만은 분명하다. 위덕왕이 오랜 세월동안 왕위에 있었으므로 혜왕이나 법왕 모두 자신들에게 왕의 자리가 돌아오리라 생각하지 못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