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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기행(39)]하남시 춘궁동 / 발길마다 눈길마다 500년‘백제 비밀’과 맞닿다

발길마다 눈길마다
500년‘백제 비밀’과 맞닿다


화유산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직 우리는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외국 유명박물관에 전시된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을 보면서 감탄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들 박물관에 있는 것들이 과연 그들의 것인가? 제국주의시절에 약탈과 도굴의 소산이 아니던가? 문화재는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가치가 있다고 했다. 그들은 자국의 문화재만으로는 하나의 박물관도 운영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유산이 빈약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약탈해온 문화재를 훌륭하게 보호하고 전시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있는 문화유산도 지켜내지 못하니 어찌 한심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화유산은 단순히 과거의 것이 아니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민족은 저력이 있다. 오랜 역사적 유산이 그 저력을 만들어낸다. 중국의 진시황릉과 만리장성을 보는 서양인들은 중국인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중국의 저력을 느끼고 전율한다. 우리에게도 훌륭한 문화유산이 많다.


세계의 문자중 가장 훌륭한 훈민정음, 목판인쇄물, 금속활자 그리고 석굴문화의 결정체 석굴암 등 헤아릴수 없이 많다. 문화유산은 천재적인 ‘창조의 능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계승의 능력’에 의해 전해진다. 우리에게 문화유산이 있다는 것은 우리조상들이 천재적인 문화창조의 능력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계승의 능력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시대에 와서 개발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문화유산을 깡그리 없애버리고 있으니 후손들은 이 시대의 문화적 행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서울의 석촌동고분은 이 지역이 개발되기 전까지 수백기가 존속하고 있었다. 백제의 돌무덤이다. 마치 압록강 건너 중국 집안 땅에 흔하게 볼 수 있는 고구려 적석총처럼 축조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떤 기준으로 판단했는지 몰라도 모두 없애버리고 교육상 필요한(?) 몇 기만 남겨 놓았다. 방이동고분도 마찬가지다. 수백기의 고분이 지금까지 존속했더라면 도심 속에 옛 무덤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경주와 같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제 더 늦기 전에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문화는 진정한 장인정신으로 창조해야 할 것이다.


론이 길었다. 등잔 밑을 더듬어 바늘을 찾듯 서울에서 가까운 곳을 더듬어 보자. 하남 땅은 아직 미지의 땅이다. 겉으로 드러난 유적지를 포함해 땅속에 비밀을 간직한 문화재도 매우 많은 지역이다. 그래서 역사학자와 향토사가들의 가설과 학설 속에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춘궁리 절터(동사)-미륵사-이성산성-광주향교-선법사로 이어지는 라인은 그 가설들의 중심에 있으며,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백제의 500년 도읍지였던 하남위례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학자마다 의견이 다양하다. 몽촌토성, 풍납토성 또는 하남의 교산동토성 등을 비정하고 있으나 아직 가설 일 뿐이다. ‘500년’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제왕조의 궁터를 찾지 못하고 있으니 개발이라는 논리가 아쉬울 뿐이다.


하남 춘궁리 고골낚시터에서 구리-판교간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통과해 들어가면 다보사가 있다. 작은 절이다. 서울 도심을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마치 먼 시골에 온 듯한 느낌이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굵어 시원하여 깊은 산중사찰에 온 듯하다. 다보사는 옛 동사(桐寺) 위에 지어졌다. ‘동사’ 명문의 기와가 발굴을 통해 많이 출토되었다. 숲 속에는 네모난 주춧돌이 일정한 간격으로 길게 놓여 있는데 얼핏 보기에도 예사스럽지 않다. 대단히 큰 건물이었던 듯 지금의 다보사 법당 아래까지 이어진다. 건물터의 가운데 부분에 팔각으로 된 곳이 있는데 이곳이 법당이었다면 부처를 모셨던 대좌 자리에 해당한다. 팔각으로 주위를 돌리고 가운데는 구멍 뚫린 심초를 놓았다. 이 건물은 법당이 아니라 목탑터라고 한다. 그리고 심초석은 사리를 봉안했던 곳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