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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 치과의사문인회](소설)푸른얼 (4)/신 덕 재

황 노인의 발치 부위에서는
용혈(鏞穴)의 용암처럼
선붉은 피가 분출되고 있었다


1984년 2월 7일은 동계 진료 마지막 날이다.
동이 트기도 전인데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오전 진료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의과 파트에서는 젖소에 받쳐 장단지 근육이 파열된 환자에게 근육접합 수술을 성공적으로 시술했다. 치과 파트에서는 다섯 명의 환자에게 틀니를 장착해 주었다. 모든 회원들이 봉사의 참뜻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제 황(黃)노인의 모습은 창호를 번뇌와 고뇌 속으로 밀어 넣었다. 오전 진료 내내 황 노인의 말은 창호의 뇌리를 때리고 있었다.


“아픔의 고통을 아시오. 이놈의 이빨 하나가 입천장을 받치고 있어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고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소. 이제는 미치겠단 말이오. 요놈의 이빨 하나만 빼면 날아 갈 것 같소. 제발 요놈 하나 빼 주시요.”


하지만 창호는 그 병소가 일반 질병과 다른 악성종양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에 이틀 간 계속된 황 노인의 간청을 거절 하였다. 입천장의 뼈가 증식되어 이동된 이(齒)가 목젖을 가로막고 있었다. 조그만한 이 하나가 환자에게 주는 고통은 단순히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숨 한번 제대로 못 쉬는 정도가 아니고 그 이상이었다. 창호는 황 노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그 고통을 선뜻 해소시켜 줄 수가 없었다.


작은 소망을 들어주므로 황 노인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고통을 덜어 준다면 이는 의사가 환자에게 할 수 있는 기본적 의무이지만 그 작은 소망을 들어 줌으로써 황 노인의 생명에 위험이 가해진다면 환자의 생명을 보장하여야 하는 의사의 원칙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상반된 의무와 원칙이 의사의 양심을 어지럽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였다. 이를 뽑아 주면 황 노인의 고통을 덜어줄 수는 있지만 이것이 황 노인을 죽이는 살인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창호는 봉사와 사랑과 자비를 생각했다. 언젠가 영임에게 사랑과 자비는 예수나 석가의 전유물이 아니므로 빌리거나 꿔서라도 행해야 한다고 역설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생각일 뿐, 행하는 데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 사랑은 용기가 필요하다. 희생도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안위와 편안함 만을 생각한다면 무슨 봉사를 할 수 있겠는가?.


창호는 용기를 북돋우려고 심호흡도 하고 손도 불끈 쥐어 보았다. 그러나 창호에게는 지금 사랑과 자비를 베풀 용기가 없었다. 이런 용기보다는 죽음을 만든 의사가 될까봐 더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불행하게 되었을 때의 사회적, 도덕적 비난도 두려웠던 것이다.
“의사 선생님 내 죽어도 좋소. 이 이빨 하나만 빼 주시면 뒷일은 전혀 묻지 않겠소.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게 도와 주시오.”


이 말은 사회적 도덕적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환자가 조건 없이 병을 고쳐 달라는데 의사가 이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해소해 줄 천의(天意)가 있는 것이다. 힘을 내자! 의사의 본분을 지키자!.


처절한 황 노인의 애소(哀訴)에 창호는 발치겸자(이 뽑는 기구)를 힘있게 잡았다. 이는 시술의 시작이며 환자의 고통을 없게 해 주는 천사의 애봉(愛棒)이다. 힘 하나 안들이고 황 노인의 이는 순간적으로 빠져 나왔다. 창호의 얼굴이 창백했다. 긴장과 흥분이 창호를 백지장처럼 만들었지만 발치겸자 끝에 매달린 이는 힘차게 거머쥔 창호의 손 힘에 의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창호의 깊은 곳에 숨어있던 파란 마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정말 해 냈구나! 고뇌와 번민의 소굴에서 벗어났구나! 이제 황 노인은 삶의 희망을 가질 거야. 아니 소원을 성취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야.
“어!, 지혈이 안 되는데요. 출혈이 이상해요!”


“수혈 세트 준비하고 지혈제 주사 준비!”
“수혈 세트도 없고 수혈할 혈액도 없습니다.”
“혈압이 떨어지고 있어요.”
“동공이 확대되고 혼수 상태 입니다.”
“심장 맛사지! 기도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