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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 치과의사문인회](소설)푸른얼 (6)/신 덕 재

 

 

 

나의 주검이 영임씨에게 도착하면
나를 임진강가에 뿌려 주시요
그래서 더 넓은 파란 바다로
나갈 수 있게 해 주시요

 

신 덕 재

·수필가, 1995년 ‘포스트모던’등단
·서대문구 중앙치과의원 원장

 

“소포요, 소포. 도장 가지고 나오세요.”
장대비가 쏟아지는 한낮에 우편 배달부가 인터폰에 대고 소리쳤다.
무심히 받아든 소포에는 발신지가 빗물에 으깨어져 알아보기 힘들었고 그 사이로 ‘이창호’라고 흐릿하게 적혀 있었다.


세찬 수돗물과 같은 낙수물이 홍수를 이루어 영임의 마음 속으로 밀려왔다. 가위눌린 사람처럼 서 있던 영임은 소포를 풀었다. 그 속에는 몇 장의 편지와 작은 상자가 있었다.
항상 생각나는 영임씨에게.


지금 나는 토굴에 와 있습니다. 이 토굴은 문둥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하늘의 죄를 지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파란마음을 펼치고 있습니다.
황 노인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세상의 꿈을 져버리고 파란 마음을 펼치게 하였으며 영임씨의 체온은 나락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구출하여 이곳에 오게 하였습니다.
벌써 5년이 지났군요.


창호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영상들이 확대되어 펼쳐졌다. 뽑아든 황노인의 이를 창백한 모습으로 바라보며 끝내 해내고 말았다는 환희의 감격을 감추지 못하던 창호. 맹호처럼 깨어나 영임이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창호. 항상 그리움만으로 바라보아야 했던 창호.
이곳 토굴의 모습은 처참합니다. 살과 신경이 문들어저 나가고 있어도 누구 하나 도와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모두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랑이 필요하고 자비가 요구됩니다. 외형적 고통 보다 내적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파란 마음이 필요합니다.


지금 18세 된 순주가 죽으려고 합니다.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과정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이 모든 죽음의 과정에 나의 파란 마음은 너무나 미약합니다.
영임은 창호의 파란 마음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새삼 느꼈다.
성인이 따로 없으며 성자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나 성인과 성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용기와 의지가 없는 것이다.


주위의 헛개비에 사로 잡혀 그 용기와 의지를 펴지 못할 따름이다.
눈썹이 빠지고 손끝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나도 순주와 같습니다.
여기서 신을 부르거나 구원을 청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의 손이 못하면 손목으로 하겠습니다. 손목이 못하게 되면 몸으로 해야 합니다. 마침내 몸도 못하게 되면 파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파란 등불이 꺼져 갑니다. 쓰리고 아픈 죽음의 과정이 계속 되다가 고요해지고 있습니다.
신경에 대못을 박는 아픔이 이제는 사라지고 편안함과 따뜻함이 있습니다.
죽음이 얼마나 편안한지 모릅니다.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죽음의 정의를 터득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영임씨를 떠올리는 것은 영임씨가 나의 죽음의 종착역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영임씨는 나의 시발역이었으며 종착역입니다.


영임씨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나의 주검이 영임씨에게 도착하면 나를 임진강가에 뿌려 주시요. 그래서 더 넓은 파란 바다로 나갈 수 있게 해 주시요.
영임은 창호의 편지를 들고 오열했다. 참사랑을 깨달은 눈물이고 못 다한 사랑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편지장을 적시고 있었다. 얼룩진 편지장에는 포효하는 맹호의 모습이 있었다.
가슴이 텅 빈 종이 학은 그 울부짖음에 떨고 있을 뿐이었다.
작은 상자에는 창호의  잿빛가루가 들어 있었다. 영임은 창호의 잿빛가루를 안고 임진강으로 향했다. 장대비는 그치고 파란 하늘을 흑색 먹구름이 뒤덮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