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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기행(42)]역사의 고장 "연천"

비운의 역사속으로
가족나들이 어때요!!
역사의 고장 ‘연천’


임진강과 한탄강이 짙푸르게 흐르는 경기도 연천은 특별나다. 역대 왕조의 비운이 감도는가 하면 현대사의 질곡도 짙은 멍으로 커다랗게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아픔과 슬픔을 깊은 곳으로부터 지각이 요동치듯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었으니 선사유적의 출현이다. 지층 깊숙이 꼭꼭 갈무리해 놓았던 선사(先史)의 비밀을 풀어놓으므로 해서 국내에서보다 세계사에서 단번에 주목받는 곳이 되었으니 전곡리구석기유적이 그 것이다.


눈맛을 쫓아 다니는 여행객들이야 관심 밖이지만 사람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문화유산답사 여행꾼에겐 최고의 여행지 중 한 곳이라 자부한다. 무엇보다 오가는 길이 편하며, 현지에서도 웬만해선 다른 여행객들에게 시달리지 않는다. 전 시대를 거쳐 나타나는 유적 분포가 흥미를 돋운다. 아직은 풀섶을 헤쳐야 하는 곳이 많지만 그러므로 해서 박제된 역사의 현장이 아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곳이 많다.


휴전선을 가까이에 두고 있어 제약이 심하던 것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일주일 전에 군부대에 신상명세를 접수하고 허가를 받아야만 갈 수 있었던 여행지(경순왕릉, 태풍전망대)가 이제는 당일 여행도 가능하게 되었다. 당일 날 검문소에 도착해서 신분증을 제시 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연천으로 가는 길은 여러 통로가 있지만 자유로를 이용해서 가는 것이 좋다. 혼잡하지 않으면서도 한강과 임진강을 곁에 두고 달려갈 수 있는 행운을 만날 수 있다. 자유로에서 임진각 못 미처 반구정과 적성방향(37번 국도)으로 빠져 나온다. 37번국도 적성방향으로 조금가면 임진강과 나란히 달리는데 그 한쪽에 율곡선생의 선견지명이 서려있는 화석정을 만날 수 있다.


화석정은 임진강을 굽어보며 임진왜란의 이야기와 더불어 유비무한의 중요성을 이야기 해 준다. 계속 그 길을 달리면 파주시 적성에 닿는다. 적성면 소재지에서 좌회전하면 임진강을 건넌다. 장남교를 건너 계속 직진하면 경순왕릉 표지판을 만난다. 군인들에게나 어울릴 전방 깊숙한 곳에 천년 사직 신라를 왕건에게 바친 경순왕릉이 있다. 그가 신라를 들어 고려에 귀의했다고는 하나 경주에 그대로 있다면 신라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세력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주에서 살지 못하고 고려 조정의 눈길이 닿는 개경 가까운 곳에 살았다.


왕건의 딸(낙랑공주)을 부인으로 삼고 비록 천년 사직을 고려에 바치기는 했으나 나라를 보전하지 못한 한은 응어리로 남지 않을 수 없었다. 늘 서라벌을 향해 서며 그리움을 달랬으니 그곳을 지금도 도라산이라 부른다. 그래서 경순왕릉은 외롭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외롭고 고달픈 것이 그의 삶인 것이다. 이곳은 6·25전만 해도 북한의 장단군이었으나 그 후 연천군 고랑포리가 되었다. 남방한계선 200m 아래쪽이니 김신조가 철조망을 뚫고 침투한 곳에서 멀지 않다. 비운의 한을 삭히며 임진강을 밤낮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문화해설사를 위한 간이 건물 안에는 언제든지 가져다 볼 수 있도록 신라문화보존회에서 만든 ‘敬順大王 略史’라는 책자를 비치해 놓아 언제든지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그 책의 내용은 조금 인용하면 “경순대왕께서 천년사직을 들어 고려에 양국(讓國)하신 것을, 무심한 일부 사학자나 세인들이 흔히 항복이라 표현하나, 그것은 결코 항복이 아니고… 군왕의 권위를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민생을 생각하고, 국가존망지추에 처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무고한 백성들이 희생을 치르는 것을 나는 차마 못하겠다’고 하시며 무모한 항전을 포기하고 세상과 백성을 위하여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나신 대왕의 높은 뜻을 우리는 올바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경주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무모한 항전을 포기한 결과라고 말한다. 끝까지 항전하다가 패망했다면 천년의 신라문화가 잘 보존 될 수 있었겠냐고 말한다. 백제의 결과를 생각해보면 맞는 견해인 듯하다. 철저히 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