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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수필)희망봉에서 얻은 행운/김영진

출근길엔 황사비가 내리더니 만개한 자목련이 또 하나의 구름을 이루고 있는 봄날 오후이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퇴근길에 동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청계천 냇가를 걷는다. 광화문역까지 간 다음 5호선을 타고 오목교역 근처 우리 집에 도착하려면 모두 70분이 걸린다. 이 환상의 퇴근길을 위해 청계천이 복구된 후 우리 병원의 진료시간을 1시간이나 단축했다.


동대문 옆 버들다리 밑에선 키버들이 하루가 다르게 초록에 물들어가고 경쾌한 물소리가 리듬분수와 어울려 자연의 합창을 연주한다. 여기저기 싹튼 원추리와 꽃창포들이 봄의 전령처럼 하루 내 지친 눈과 마음을 씻어준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없는 도심에서 새와 초목과 물고기와 함께 숨 쉬며 걷는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배오개다리 근처에서 요즘 청계천에 짱박은 두 마리의 청둥오리와 인사한다. 처음에는 새우깡을 한 봉지씩 들고 가서 녀석들에게 나눠주곤 했지만 시민들이 음식을 마구 던져주는 것을 보고서는 단념했다. 떡이나 부침개, 김치, 먹다 남은 삼겹살까지 안 주는 것이 없다.  심지어 스티로폴 도시락 껍질까지도 찢어서 던져준다. 검은 녀석이 며칠 동안 안 보여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어제 돌아와서 흰 목도리 갈색 녀석이 매우 안도하는 눈치이다.


농촌에서 자란 나에게 억새는 논농사의 적이었고 바라구는 밭농사의 원수였다. 그러나 청계천 물가의 억새와 바라구는 어찌 이리도 아름답고 상큼한가? 수없이 뽑아서 말려 죽인 억새와 바라구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먹고 살아야 했다.
 관수교 못 미처서는 털부처꽃 사이로 능소화 덩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 벽을 기어 올라가고 주변엔 철쭉들이 삼색으로 만개해 있다. 광통교 아래 여울속의 돌무덤 사이에선 뼘치 급 붕어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다가 언뜻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잽싸게 내뺀다.  역시 눈치 빠른 물고기는 달라! 낚시꾼을 알아본다니까 글쎄….


 빠르게 걷기 45분을 마치고 청계천 광장으로 올라선다. 서울생활 23년이 되도록 이렇게 걸어서 퇴근을 하리라곤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이 아름다운 퇴근길을 갖게 되기까지 나에게는 두 가지의 행운이 뒤따랐다. 하나는 청계천의 복구라는 행운이고 또 하나는 남아프리카 희망봉이 안겨준 행운이다.


실은 서울에 살면서 30분 이상을 계속 걸어본 일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여의도 윤중제 벚꽃놀이라도 갈라치면 발바닥이 아파 30분 이상은 걸을 수 없었다. 사실 지난해가 되도록 지금 신고 다니는 종류의 신발과 같은 것은 한 번도 신어본적이 없었다. 길거리표 아니면 잘해야 K나 E상표의 구두를, 그것도 아내가 억지로 끌고 가다시피해서 겨우 한 켤레씩 장만했을 뿐이었다. 별로 아끼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이것저것 마구 함부로 구겨 신고 다니기만 했으니 오래 걸으면 발이 편할 리 없었다. 물론 멋이나 패션 같은 것은 생각해본 적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걸치면 옷이고 쓰면 모자고 하는 식으로 50년 넘게 살아왔다.


 언젠가는 아내가 유난희의 ‘명품 골라주는 여자’라는 책을 사와 보여주기에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지난해 5월에 목동현대백화점 개관 1000일 기념행사에서 1000원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면 추첨을 통해 신데렐라를 뽑아 부부를 변신시켜 준대서 거기에 응모했다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는 배꼽을 쥐고 웃었다. 몇 만 명중에서 댁이 뽑힌다고? ㅋㅋ 꿈 깨!
 그리고 5월 하순 우리 가족은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다.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열리는 세계 구강악안면방사선학회에 참석하고 빅토리아 폭포를 비롯한 아프리카 남부 5개국을 순방하는 일정이었다. 행운권 응모 따위는 벌써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아내가 신데렐라로 당첨되었다는 그날 우리는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희망봉에 가 있었다.


 백화점 측에서는 온갖 방법으로 통신을 시도했지만 텔레파시조차도 지구의 반대편엔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 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