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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치과의사문인회)-소설-]바보죽음(끝)/신덕재


바보죽음 (끝)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차디찬 흰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보랏빛이 스며든다
보랏빛! 숭고의 빛이로구나

 


4일째.
숨이 가쁘다. 그렇게도 조용하게 있던 가슴이 용솟음치는 용천 같이 솟아올랐다 가라앉곤 한다. 기도에서는 쌕쌕하는 휘파람 소리가 난다. 공기가 어디를 거칠게 부비며 지나가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아픔의 고통은 없다. 이제는 용천의 숨가쁨도 사그러진다. 다만 여기 저기서 수군대는 소리인지 걱정하는 소리인지 모르지만 모기 소리 만한 것이 들릴 뿐이다.


“운명 하셨습니다.”
운명(殞命)! 운명이라면 내가 죽었다는 것 아닌가? 내가 왜 죽어? 아픈 사람이 아프지 않으면 다 나았다는 것 아닌가? 지금 나는 아무데도 아프지 않다. 아픈 데가 없으니 편안하고 행복하다. 고통이 없어지니 기쁘고 지난 일들이 아름답다. 돼지사장이 왜 이리 고마운지 모르겠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해 주지 않았는가? 딸보 녀석은 어떠한가? 그래, 네가 잘 못한 것이 뭐냐? 나 혼자 공연히 애태우고 고심했을 뿐이지. 너는 잘 못한 것이 없지? 찬영! 찬영이, 너는 나의 하늘이고 바람이다. 네가 있어서 나는 힘이 나고 살맛이 났단다.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충만한 내가 왜 죽었단 말인가? 나는 죽음의 암흑이 싫다.


나는 일어나고 싶다. 일어나 걷고 싶다. 걸어나가 밝은 빛을 보고 싶다. 저 광채는 무엇일까? 알 수 없는 빛이 들어온다. 흰 빛이로구나. 흰 빛이 나의 온 몸을 감싼다. 흰 빛에 이끌려 일어나 앉는다. 


이 때 “외삼촌! 외삼촌은 왜 그렇게 어리석어요?”
아니, 저녀석은 나의 하나밖에 없는 조카 재규가 아닌가? 야 재규야! 너의 막힌 항문은 다 나았니? 언제 이렇게 컸니? 사실 너에게 참 미안하다. 막힌 항문을 고쳐 주지도 못하고….
“외삼촌! 내가 수술을 당할 때마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는지 아세요?”
그래 안다 알아. 지금 내가 아픔의 덩어리 속에 있고 보니 너의 고통이 어떠했는지 알 것만 같다. 미안하다. 미안해.


“미안해 할 것 없어요. 다 외삼촌이 못나고 어리석어서 그래요! 돼지사장 보세요. 외삼촌이 돼지사장을 도둑놈 사기꾼이라고 하지만 지금 돼지사장은 남보란 듯이 잘 살고 있잖아요. 그리고 지금 돼지사장은 외삼촌을 죽은 개(犬) 거적에 말아 버리듯이 버리려고 해요.”


야 재규야!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돼지사장 얘기는 왜 하니? 떵떵거리고 잘 사는 돼지사장이 어때서 그러냐? 돼지사장은 돼지사장대로 사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살아왔지 않니? 설령 돼지사장이 나를 거적에 말아 버린다 한들 내가 나쁜 놈이냐? 돼지사장이 나쁜 놈이지. 자 봐라. 내가 아프다고 하니까 ‘딸보 서씨’ 아저씨, 찬영이 아저씨 등 많은 사람들이 위로하려고 오지 않니? 이 얼마나 좋으냐? 재규야, 너무 나를 나무라지 마라. 나도 힘겹게 살았단다.
“외삼촌! 정신 차리세요. 딸보 아저씨가 외삼촌을 위로하러 왔다구요? 어림도 없는 소리예요. 돈 떼어먹으려고 온 거예요. 그리고 찬영이 아저씨도 노동쟁의 사건하나 맡으려고 온 거예요. 알았어요? ”


재규야! 너는 왜 자꾸 이 외삼촌을 슬프게 만드니? 돼지사장이나 ‘딸보 서씨’나 찬영이 아저씨가 나를 위해 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지 않니? 나도 좀 자랑스럽고 보람된 일들이 있었어야 하지 않니? 너는 내가 지금까지 어리석고 바보스럽게 살았다고 볼는지 모르나 나는 지난 일들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다. 그래도 나는 참되게 살았다. 바보가 누구인지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이 녀석아! 나는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빚을 지지 않았다. 다만 너를 고통 속에 보낸 것이 나의 빚이란다. 이해해 다오. 그래도 나는 너뿐이다. 너를 사랑한다. 지금 나에게 하는 너의 소리는 다 더러운 세상을 두고 하는 말이지? 그렇지? 네가 나에게 무슨 소리를 하든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차디찬 흰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보랏빛이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