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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치과의사문인회)-소설-]파리채와 하이나싱의 6월(1)/김영훈

파리채와 하이나싱의 6월 (1)


빨치산이 들어오면 인공기를
경찰이 들어오면 태극기를
번갈아 올려야 했다
그 때를 놓치면 목숨이…


1950년대는 파리나 모기를 죽이는 약으로 ‘하이나싱’상표가 붙은 사이다병의 파리약을 사용했다. 병뚜껑에 분사용 빨대기가 붙어 있어 뒤에서 입으로 불면 약이 분사되어 파리를 잡던 때였다. 파리채로 파리를 잡는 것보다 이 약으로 파리를 잡는 것이 더 위력적이었다. 파리 떼가 우글거리면 여느 집에서는 파리채로 후려쳤고, 부잣집에서는 하이나싱을 더 뿌려댔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한 곳곳에서 지주와 소작인들의 관계가 우익과 좌익으로 양극화되었다. 공산당에게는 이런 빈부의 격차가 남한의 약점이 되기도 했다. 인민을 해방시킨다는 명분 아래 적화통일의 야욕으로 남침하여 그 피해가 많았지만, 특히 남한사람들 사이엔 갈등의 골이 더 깊게 패여 그 참상은 극치를 이룬 상태였다. 다행이 UN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섰지만, 지상에서는 총탄과 죽창이, 상공에서는 폭탄으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파리 목숨이 되었던가.


북한군이 후퇴해가자 공산군과 끈이 떨어진 패잔병과 부역자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빨치산으로 하여 산간 지방은 다시 피해가 극심해갔다. 지리산 토벌작전이 유명했듯이 부안 변산과 고창 방장산엔 부역자들이 입산하여 저항세력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잔인무도의 빨치산 행각을 자행했다. 그들은 민족해방 전사라는 미명 아래 활개를 쳤고, 반면에 자유민주주의는 부패한 정권으로 설득력을 잃고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의 지형지물이 이런 전시에는 적들의 소굴이 되어 아지트로 이용되었다. 부안에는 변산, 고창에는 방장산, 정읍에는 내장산이 있어, 이 삼각지대 주변에 사는 양민들의 피해는 매우 컸다.
줄포 면소재지는 변산과 방장산 길목에 있어, 공비가 자주 출현하여 약탈과 살상이 빈번히 일던 곳이다. 낮에는 경찰이 탈환하여 지서에 태극기를 꽂았고 밤에는 빨치산이 들어와 인공기를 꽂고 활개를 쳤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는 치열한 싸움이 3번이나 반복되는 동안 말할 수 없는 살상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민간인들은 눈치 보기에 바빴다. 빨치산이 들어오면 인공기를, 경찰이 들어오면 태극기를 번갈아 올려야 했다. 그 때를 놓치면 목숨이 날아가는 순간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들은 밤이면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변산의 정상에는 변빨들이(변산 빨치산), 고창 방장산 꼭대기에는 방빨들이, 내장산 최고봉에는 내빨들이 밤마다 봉화를 올려 잔당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민가에 불안과 공포를 심어주는 심리전도 펴곤 했다. 빨치산들의 통신수단은 전단지를 뿌리고 가는 일이 고작이었으니, 깜깜한 밤에 봉화의 불빛은 주변의 주민을 선동하는 심리전에 이용되었다.
잠시 남한이 점령당했을 때 인민군들은 줄포에도 들어왔다. 인민군들은 대개 까까머리 소년들의 모습으로, 어깨에 긴 총을 거꾸로 메고 지나가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들은 주민들을 해치지 않았다. 아마도 치열한 전투지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UN군과 국군이 북진하는 동안에도 경찰과 빨치산 사이엔 치열한 일진일퇴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 가운데 양민들은 동네북이 되었다. 남남인들의 갈등으로 산 개울마다 동네 도랑마다 핏물이 흘러내렸다.


전시에 약이 귀하여 뭇매를 맞아 골병든 사람은 똥물을 다려 먹이는 민간요법이 고작이었다. 누구네 똥물이 진국이어서 약효가 좋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총상을 입은 부상자는 호박잎이나 아주까리잎에 된장을 듬뿍 발라 붙이는 것도 유일한 묘약이었다.
빨치산들의 세포조직은 대개 2~3명이 한 조가 되어 기동성을 발휘하다가 크게 세를 규합하면 단체를 이루었다.


경찰은 원조 받은 실탄으로 마구 갈겨댔지만 보급이 없는 빨치산은 총알이 아까워 죽창으로 맞서는 이 살육의 현장, 동족을 파리 잡듯 서로를 살상했다. 시체들은 길가에 널브러져 썩어갔다. 어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