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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기행(45)]화양계곡

여름 끝자락…속리산 ‘속살’ 손짓
수려한 경치·암반위 세찬 물살
우암 송시열 ‘화양구곡’이라 불러


읍궁암·암서재·첨성대일때
‘북벌 의지’ 담은 암각 글 곳곳에

 

화양계곡은 속리산 자락에 있다.
속리산하면 법주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야
생각지도 못한 지리적 개념이 되겠지만
속리산의 품이
그만큼 넓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괴산군, 상주군, 보은군의
경계를 가르는 속리산은
많은 명승과 전설을 품고 있는데
그 가운데 나의 맘 길이
머무는 곳은 화양계곡이다.

 

화양계곡은 삼남에서 으뜸가는 명승지로 우리나라에서는 꽤 명성이 높은 곳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또는 대학MT, 친목모임 등으로 한번쯤은 다녀왔음직한 곳이며, 혹 다녀오지 못했다하더라도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다. 위압하지 않는 편안한 산과 곳곳에 수석처럼 놓여 있는 바위, 그 사이를 헤집고 흐르는 맑은 물과 전설 한 자락쯤 품고 있을 아름다운 소가 있어 그 명성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것을 체험한다.


화양계곡을 여름이 저물고 있는 이때 소개하는 것은 계곡이 아름다워서 만이 아니다. 그곳이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화양계곡이라고도 하지만 화양구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 땅 곳곳의 아름다운 계곡과 경치에는 이름이 붙는데 이러한 곳을 답사하며 하나하나 짚어보면 옛 선조들의 생각을 읽어 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름다운 경치에 이름을 붙여 9곡이니, 팔경이니 하는 것이 많다. 이는 조선 선비들이 존경해마지 않던 주자가 무이산에 살며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이름을 붙여 ‘무이구곡’이라 한 것을 본 따서 지은 것이다. 화양구곡은 조선시대의 거유(巨儒) 우암 송시열과 그의 제자 권상하에 의해서 이름 붙여졌다.


화양계곡은 우암 송시열과 뗄 수 없다. 우암은 조선 효종∼숙종때에 이르는 대유학자로 ‘송자’라 불릴 정도로 성리학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이이(율곡)-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계승자이며, 노론의 정치적 영수로서 많은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무려 3000번이나 거론될 정도로 조선 정치사와 유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우암이 화양계곡에 은거할 뜻을 품은 것은 1666년(현종7) 그의 나이 60이 되어서였다. 당시 예송논쟁으로 인한 뜨거운 중앙정치의 어려움 속에서 그가 배운 학문과 현실과의 괴리에 고뇌하는 시기였다. 그리하여 조선 팔도 이곳저곳을 유람하며 머물렀다 떠나기를 반복하는데 그가 화양계곡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곳에서 가까운 청천에 침류정을 빌려 잠시 머물고 있을 때 화양계곡을 알게 된다. 그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 ‘화양계당(華陽溪堂)’이라는 초당 5칸을 짓는다. 이 자리는 훗날 그의 제자들에 의해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오래 머물지 못하다가 77세가 되던 해, 벼슬을 그만 둔 뒤에야 이곳에 머물며 효종과 함께 추진하려던 북벌의 대의와 연관된 여러 가지를 일을 추진하게 된다. 금사담 바위 위에 3칸의 조촐한 정자(암서재)를 짓어 머물며 학문을 정진하며 나름대로 그의 삶을 정리하게 된다.


화양구곡 중 ‘첨성대’바위 아래 명나라 의종의 어필 ‘非禮不動’을 새긴 것이나 임진왜란 때 도와준 황제 신종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의 사당을 세우려는 뜻을 보이는 것은 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는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스승이었다. 봉림대군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끌려갔다 돌아와서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를 대신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효종은 병자호란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을 중용해서 북벌의 의지를 다진다. 삼전도에서 당한 치욕과 인질로 잡혀갔던 심양에서의 모욕을 갚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효종이 갑작스럽게 돌아가므로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조선사회는 북벌보다는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