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7 (금)

  •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문인의 향연(치과의사문인회)-수필-]먹이 사슬(상)/김영진

 

우리 시골집 돼지우리는 사립문 옆 두엄자리 건너편에 있었다. 돼지우리는 좌, 우 두 칸으로 나뉘어져 보통 두 마리의 꿀돼지가 살고 있었고 그 오른편엔 해묵은 고욤나무가 외롭게 서 있었다. 고욤은 너무 떫어서 늦가을 된서리를 맞은 후 까무스름하게 익어 저절로 떨어지기 전까지는 도저히 먹을 수 없다. 그러나 떨어진 열매조차도 거의 80%가 씨였고 10%는 껍질이어서 적당히 빨아먹고 나머지는 뱉어야만 한다. 하지만 입안에 남는 새까만 과즙은 조금만 머금어도 정수리가 찡해질 만큼 달고 끈끈했다.


돼지우리 왼쪽으로는 높다란 깨중나무와 작달막한 포도나무가 흙 담장과 오롯하게 어울려 있었다. 돼지우리에서는 항상 질척한 분뇨가 흘러나와 포도나무 뿌리 밑에 고이기 때문에 해마다 포도열매가 유난히도 많이 열리곤 했다. 탱탱하게 여물어가던 초록색포도는 미처 보라색을 띠기도 전인 팔월 초쯤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마는데 그 이유는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눈물을 찔끔거릴 정도의 신맛까지도 잘 감내하던 우리형제들의 왕성한 식욕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 포도가 청포도였던 것만은 맹세코 아니다.


당시 집에서 기르던 돼지들은 거의 언제나 검은 바탕에 흰 가슴 띠가 있는 뉴햄프셔 종이었다. 그 녀석들은 유별나게 먹성이 좋아 멀리서도 내 모습만 보면 우리 안을 빙빙 돌아다니며 밥 달라고 꽥꽥 악을 써 댔다. 그러면 나는 으레 바강댕이에 쌀겨를 가득 퍼서 한 바께스의 구정물과 함께 녀석들의 먹이통에 부어주곤 한다.


빈 바께스를 채우던 큰 구정물통은 언제나 부엌 앞 작두 샘 근처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놓여 있었다. 커다란 통 안에다 쌀뜨물이나 고구마껍질, 무청, 시래기, 생선내장이나 닭뼈, 쉰밥, 상한음식, 파뿌리, 콩나물대가리 등을 모두 털어 넣기 때문에 구정물의 확실한 주성분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구정물통에서 열 발짝이나 멀리 떨어져도 항상 시큼한 식초냄새가 풍겨왔지만 돼지 녀석들은 잘도 먹어댔다. 아무튼 우리 집의 뉴햄프셔들은 먹고 또 먹어도 양에 안차 계속 소리를 질러대다가 내가 안보여야만 잠잠해지곤 했다.


녀석들은 비좁은 돼지우리 안에서 아무리 뱅뱅 돌고 또 돌아보아도 먹을 것이라고는 내가 주는 구정물과 쌀겨밖에 없었다. 닭뼈조차 누렁이가 먼저 처리한 다음에야 돼지에게 차례가 돌아갔는데 아마도 무기질밖에는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추석이나 설이 되어 동네 아저씨들이 돼지의 멱을 따서 잡아먹을 때에는 두꺼운 비계에 살집만 썩 일품이었다. 돼지 멱을 딸 때 받아둔 선지피에다가 소금과 양념한 쌀밥을 섞어서 내장에 채우고 삶으면 맛있는 순대가 된다. 그러한 작업이 벌어지던 공동우물 옆 임시푸줏간 주위에서는 늘 장작 타는 ‘투두둑’ 소리와 함께 펄펄 끓는 가마솥 속의 구수한 돼지고기 냄새만 났지 시큼한 구정물악취 따위는 어디에서도 맡을 수 없었다.


우리 집 수문장격인 누렁이는 참 영리하고 사람들을 잘도 따른다. 지난겨울에는 강아지를 열 마리씩이나 생산해 할아버지의 쌈지를 그득하게 채워주기도 했다. 오늘도 아침부터 왕왕거리며 이집 저집 쏘다니다가 지금은 굴뚝 밑 양지바른 토방위에서 팔자 좋게 잠들어 있다. 하지만 누렁이가 봉착한 가장 큰 문제점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신탕을 즐기시는 계절이 다가온 줄을 꿈에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낮잠을 즐기는 누렁이의 가슴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랫배에 이르기까지 통통한 자주빛 유방에 팥알 같은 젖꼭지들이 두 줄로 나란히 늘어선 모습은 보나마나 할아버지께서 유달리 좋아하시던 모락모락 김나는 복날 배받이 수육감 이었다.
마당에서 장난을 즐기는 두 마리의 누렁이 새끼들, 즉 바둑이와 메리도 내년쯤이면 아마 제 어미의 뒤를 따르기 십상일 것이다.


실은 늘 허기졌던 돼지보다는 개나 닭, 거위, 오리 따위의 팔자가 훨씬 더 좋았던 편이다. 누렁이의 군것질거리인 들쥐나 두더지가 논밭에 시글시글 했으며 오리나 닭이 즐겨먹던 개구리와 송사리, 땅강아지, 방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