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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치과의사문인회)-수필-]먹이 사슬(하)/김영진


김 영 진

·수필가, 필명 김겸인, ‘동방문학’등단
·영진 치과의원

 


가을이 되어 벼 베기를 하는 날이면 언제나 메뚜기 축제가 벌어진다. 볏단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갈색날개의 연두빛 메뚜기 떼를 생각만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하지만 신명이 나서 분주히 쫓아다녀봤자 그리 만만하게 잡을 수는 없었다. 녀석들은 눈치가 빨라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아주 멀리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벼를 베는 어른들의 주변에 메뚜기들이 떼를 지어 난분분해도 맨손으로는 온종일 네 홉짜리 소주병 하나를 가득 채워 오기가 어려웠다.


짝짓기중인 녀석들은 약간 체구가 큰 암컷 메뚜기의 등에 귀여운 수컷이 업혀 있다. 그래서 잘 뛰지도 못하고 날아가지도 못해 두 마리를 함께 잡을 수 있어 좋았지만 정신을 한껏 다른데 팔던 녀석들을 비겁하게 잡는 것 같아 왠지 마음이 찜찜했다.


어쨌든 가을 햇빛에 얼굴이 벌겋게 달구어진 채 지쳐 돌아오면 할머니께서는 가마솥에 소금과 들기름을 지르고 잡아온 메뚜기를 볶아 주신다. 노릇노릇 짭짤 고소하게 볶아진 오동통한 메뚜기 맛은 요즘 통조림으로 나와 있는 말라빠진 북한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벼 베기가 끝난 논바닥에는 또 다른 맛좋은 단백질 공급원이 잔뜩 포진하고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자두만한 크기의 토종 왕 우렁이들이다. 꾸들꾸들하게 마른 논바닥을 거닐며 자세히 살펴보면 손가락이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다. 그 구멍에 손가락을 깊숙이 찔러 넣으면 딱딱한 감촉이 손가락 끝에 와 닿는다. 놈들이 바로 겨울을 나기위해 논바닥 속에 몰래 숨어든 우렁이들인데 다리가 없어서 도망치지도 못하는 녀석들이므로 차분하게 앉아 꼬챙이로 파내어 광주리에 담기만 하면 되었다. 어떤 때는 하루에 한 광주리씩 캐내기도 했는데 그 녀석들을 푹 삶아서 뾰족한 못으로 알맹이를 빼내 고추장과 식초에 섞어 버무리면 우렁이 회 무침이 되고 된장찌개에 넣고 끓이면 우렁된장이 되어 우리가족들의 입맛을 돋우었다.


대나무로 엮은 닭 초롱 안에서 삼주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며 알을 품었던 어미닭은 어느 날 한 다스나 되는 노랑병아리들을 데리고 초롱 밖으로 나온다. 삐약 삐약 쫑쫑거리는 병아리들을 양 날개 가득히 끌어안은 어미닭은 먼발치에서라도 고양이를 발견하기만 하면 목 깃털을 사자처럼 치켜세우고 공작새같이 꼬리를 반원으로 펼친 후 두 날개로 홰를 치며 돌격한다. 식겁해진 고양이는 ‘냐아옹~! 내가 뭘 어쨌게?’ 하며 꽁무니를 빼다가도 연신 뒤를 돌아보며 귀여운 병아리들에게 한없는 미련을 간직하지만 어미닭이 꼬나보는 한 어림없는 짝사랑이다.


마당에서는 할머니와 닭들과의 전쟁이 끊나질 않는다. 허리가 직각으로 꼬부라지신 우리 할머니는 멍석에 널어놓은 고추나 깨, 옥수수 알곡, 겉보리 등을 호시탐탐 노리는 닭들과 지팡이를 무기삼아 하루 종일 게릴라전을 치르신다.


닭들의 사령관격인 어르신 토종 장닭의 멋지고 늠름한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붉고 커다란 볏은 로마시대의 빨간 투구 깃을 연상시키고 ‘꼬끼-오’ 하는 우렁찬 메조소프라노 목청은 새벽이면 십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 짜르르한 황금빛으로 코팅된 목털과 현란하게 빛나는 적갈색 깃의 우람한 몸체, 금속성 검정색으로 단장된 우아한 긴 꼬리는 가금류의 제왕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일부다처제로 여러 암탉들을 호령하던 위엄과 품위가 대단했지만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시거나 명절날이라도 닥치게 되면 속절없이 가마솥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팔자였다.


닭 잡는 날이면 나는 한 밤중에 호롱불을 들고 측간 옆 닭장에 슬그머니 들어가 작대기 위에 도열한 녀석들 중 대충 한 마리를 점지 해 날개와 발을 묶어서 끌고나온다. 옆에 서있던 녀석들은 제 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그냥 기웃기웃 바라만볼 뿐이다. 꼬꼬댁거리며 끌려나온 녀석의 모가지를 비트는 염라대왕 역은 늘 맏형인 내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