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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치과의사문인회)-수필-]노인 틀니환자와의 대화/박용호


초등학교 시절, 한때 우리 집은 인천의 송현동 수도국산에 있었다. 집안 마루에서 멀리 괘부리 선창이 보이고 바다에는 두둥실 원목 떼가 떠다녔으며, 근처 판유리 공장에서 밤낮으로 뿜어대는 시커먼 연기가 날아들어 빨래가 새까매지곤 했다. 바다가 가까워 그래도 어려서 망둥이 낚시의 추억이 어린 정든 곳이다. 우리 집은 산 위의 제일 첫 번째 열이어서 대문 밖에 바로 낭떠러지가 연해 있었는데, 비가 오면 흙이 조금씩 쓸려나가 어린 마음에 걱정이 되었다.


낭떠러지 밑, 산 아래에는 바로 잇대어 초가집이 있었다. 자연히 동네에서 나오는 연탄재 등이 그 집으로 잘 굴러 떨어지고, 어느 해는 장마 때 옆집의 옥외 화장실이 떠내려가기도 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초가집의 ‘욕쟁이’ 할머니가 부지깽이를 지팡이며 무기 삼아 그 꼬부라진 등에 고개만 빳빳이 세운 채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 노구에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원색적인 욕설과 악다구니를 어느 누구랄 것도 없이 해대기 시작하면 동네 사람들은 슬며시 대문을 닫고 들어가고, 그러고서도 한 시간씩은 그 고성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그 할머니가 무서웠다.


개원 초기에 그때 그 할머니와 비슷한 꼬장꼬장한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생각으로만 치료 못할 환자가 없을 것 같았지) 개업이 아직 일천(日淺)했고 노인네 다루는 일은 더욱이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틀니가 아파서 죽겠다고 매일 아침마다 출퇴근 하는데, 딱히 해드릴 것은 없고 아무리 이론적으로 수없이 말씀드려야 통하지도 않고, 대기실로 나가선 혼잣말로 누구 들으라는 듯이 불평을 해대기 시작하면 나는 어려서 그 무서운 할머니가 생각나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불안해졌다. 다음날 출근하는 것이 싫어지고 또 무슨 말로 대응해야 하나 걱정이 되고 또 다른 노인 환자를 대하면 꺼려지는 이른바 ‘전이’ 현상에 시달렸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할머니들은 무섭다’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기에 환자로서 당연히 불평하는 것에 대한 ‘공감’이 부족했던 것이다. 틀니 장착 후에는 명확히 눈에 보이는 후유증 이외에도 어디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사실 초보의사로서 간파하기 힘든 통증이나 불편도 많지 않는가. “아프다”, “씹지 못한다”라는 불평은 그 사실도 중요하지만 우선 의사로서 본인에게 관심을 더 가져달라는 하소연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염증도 안보이고, 교합도 유지도 좋은데 뭐가 아프냐? 시간이 가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 넘어가려 했으니 환자와의 소통이 원활치 못한 것이었다.


오히려 별 말이 없는 경우라도 “식사를 못하셔 얼마나 힘드시냐”라며 적극적으로 미리 공감해주어야 했었다. 후배 의사들도 아마도 똑같은 시달림으로 괴로워 할 듯 싶은데, 아무리 실력 좋은 치과의사라도 한 번씩은 거쳐가야 할 숙명이 아닌가 한다. 오죽하면 ‘저 노인이 언제 돌아가시나’ 불경스럽고 도리에 어긋난 생각이 든다는 의사도 있고, 하도 화가 나서 돈을 내주고 그 즉시로 틀니를 밟아 부셨다는 용감한 동료도 보았다.


성장기에 조부모와 친근하게 보낸 경험이 없는 젊은 의사들은 이런 전철을 밟기 쉽다. 이런 경우 자기와 인정상 가까운 존경하는 살붙이 같은 노인들과 긍정적으로 ‘동일시’하는 생각을 하면 도움이 될 듯 싶다.


진찰 단계에서 노인의 기대심리를 너무 높여놓아도 문제가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부정적으로 일관해도 문제다. 사람이 늙을수록 무엇이든 일단 희망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나중에 너무 따질 것이 염려되어 치조골이 거의 없다고, 당뇨가 있다고, 틀니의 후유증을 너무 장황되게 설명하는 것보다는 긍정적으로 “같이 노력해서 잘 사용할 수 있게 노력해 보자”고 부드럽게 이끄는 편이 나을 듯 싶다.


상담 시에 꼭 거치는 대화가 틀니의 수명에 대한 문제이다. 의사들은 되도록 언급하기를 기피하지만 사실 한번 하기도 힘든 환자 입장에서 그토록 주요한 문제가 어디 있을까. 어떤 의사는 ‘언제 돌아 가실지 아느냐’고 용감하게 되묻는다는 의사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