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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수필)우울증 노인과의 대화/박용호 강서구 박용호 치과의원

두 번째 부분틀니를 제작중인 단골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라고 부르기에는 아깝게 헤어 스타일도 세련되고 덕스럽고 유복해 보이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분이었다. 치료가 끝나고 나를 다시 찾아주었다는 고마운 느낌이 들어 “요즘, 힘드시겠군요…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고…” 지나가듯 무심코 말을 건네자, 당신 이야기를 술술 하신다.


“요즘 가족들과 대화가 않된다. 병 수발을 하다 하다 시어머니를 여든 아홉까지 모시고 살았는데, 돌아가시고 좀 낫다 싶었는데 딸과 며느리와 손주까지 열 식구가 같이 사니까 스트레스를 받아서 머리가 복잡해 터질 것 같다. 말을 막 하게 되고 신경질 나고, 식구들간에 일이 생기면 말이 좋게 안나간다. 치매 끼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지리산에 가서 몇 달 쉬면 좀 낫고… 틀니도 이번만 하고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나고 한번 마취 할 때마다 머리가 삐쭉하고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고(이 소리 듣고 다음에는 꼭 도포 마취 후에 마취주사를 했다), 어떤 때는 자면서 그대로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한방 우울증 약을 평생 먹는 중인데 어떤 때는 이것도 지겨운 생각이 든다. 뺨이 점점 들어가는 것 같아 양치후에 틀니를 꼭 끼고 잔다.”


‘사람이 겉만 보고는 모르는구나…’ 하는 새로움이 다가왔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만 주었는데 다음 번에 왔을 때는 자기 비밀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는 머쓱함에서였는지 안색이 훨씬 밝아 보였다. 이 환자는 틀니를 하면서,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자명한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성숙은 ‘고독’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더 이상 고독하지 않다는 것도 깨달을 때가 있지 않는가.


정신과 치료에서 정신분석의 중심적인 양상은 환자가 치료자에게 기대고 싶고, 인정과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은 강한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면담시에 환자가 부모형제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의사에게서 느끼는 전이감정의 단계가 있다고 한다. 치과의사는 자신도 모르는 중에 이런 정신과 의사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니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환자에게 꼭 필요한 멋진 말을 해주어야겠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당연히 치과의사의 범주를 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은 우울증이군요’ 지적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본인도 스스로 짐작하고 있는 터에 지적을 받으면 대개 말문이 막히고 부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항우울제를 복용중임을 떳떳이 밝히는 환자가 많다. 경제·문화 수준이 발달할수록 우울증이 증가하는 반증이기도 하고, 우울증도 뇌의 호르몬 변화에 따른 뇌질환 일뿐이라는 상식이 통하기 때문이다. 의사로서도 장시간을 요하는 정신분석보다는 약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많은 듯 한데 열악한 보험환경 탓이리라.

 

우울증 환자라고 무슨 특별 대우는 필요 없으며(물론 투약상의 배합 금기 등은 지켜야 하겠지만) 이런 환자의 치과진료는 오히려 쉬운 듯하다. 자기표현과 주장이 명료하기 때문이다. 아픈 것은 딱 질색이니 마취를 많이 해달라기도 하고 치아도 밝은 것으로 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한다. 경우에 따라 의사 입장에선 귀찮고 번거로운 생각이 들어 ‘다 늙은 사람이 뭘…’ 하는 마음속으로 빈정거림이 올라올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환자도 금방 눈치채기 마련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누구든 똑같다.


사실 요즈음 나도 우울하다. 환자도 줄고 진료 자체의 재미와 의욕이 많이 줄었다. 시력도 떨어져서 확대경을 보아야만 하고 진료 속도도 굼뜨게 된다.
뉴스를 보면 욕부터 나오게 되고 북핵사태 이후에는 환자를 기다리다가도 ‘내가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진료만 해도 되는건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한다. 얼마 후에는 극복되겠지만 나의 우울증 때문에 그 할머니의 우울증이 더 마음에 다가왔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