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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수필) 선행/김경미 의정부 조은이치과 원장

시 텃밭을 둘러보기만 하려던 것이, 그새 무성해진 잡초며 갈무리 해야 할 야채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그만 출근이 늦어 버렸다. 주차장에 이르러 황급히 주차를 하고 내리려는 순간, 운전석쪽 문 앞으로 쭈빗거리며 낯선 사내 하나가 다가선다. 섬칫 놀래면서도 가뜩이나 마음이 급한데…짜증이 난다.


검은 봉지 하나를 든 채 억지로 웃음을 보이려는 듯…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찡그린 것 같아 보이는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그는 길을 막고 서서 지갑을 꺼낸다. “뭐에요?” 나도 모르게 말이 퉁명스럽게 튀어나갔다. 재빨리 그를 살핀다. 초라한 행색이지만 그다지 위험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무슨 일인지 사뭇 궁금하기도 하다.
“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그가 지갑을 열어 뭔가를 꺼낸다. 지갑 속에서 나온 건 곱게 접어 놓은 주민등록상의 거주지를 증명하는 서류.


“그런데요…?” 내가 생각해도 냉기가 감도는 내 어투에 더욱 쪼그라들어, 사내는 어찌어찌하여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갔고 온 가족이 거리로 쫓겨났다는 쉽지 않은 얘기를 더듬더듬 풀어냈다. 아내가 길 건너편에 있다며 멀리를 가리키는데 등을 돌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낙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한번만…저 정말 이런 사람 아닙니다”를 연발하며 그가 내게 원하는 건 ‘라면 하나 살 돈’이었다. 라면 하나? 요즘 라면 하나가 얼마였더라? 이 사내는 나쁜 사람일까 아닐까? 내가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자 그가 다급하게 다시 말한다. “믿어주세요. 술 마시려는 거 아니에요.” “술..?!”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잠시 망설인 끝에 나는 마음을 정하고 지갑을 열어 만원짜리를 꺼냈다. 그에게 건네주며 라면 말고 따뜻한 밥을 사 드시라 했다. 그가 놀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고…맙…습니다… 정말 라면 하나면 되는데….”
그의 더듬거리는 인사를 뒤로 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서며 생각했다. 그들이 나를 속인 건지도 모른다. 그랬을까…? 속아주는 일 따윈 이제 더 하고 싶지 않은데 그들이 만일 그랬다면, 나를 속인 거라면, 그 업보는 내가 준 돈의 액수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커져 그에게 돌아가겠지. 애써 맘 한구석에 남은 찜찜한 느낌을 털며 몇 발짝을 옮기다 문득 그가 궁금해진다. 힐끔 돌아보았다.


‘아니!’ 나는 황급히 다시 몸을 돌려 쫓기듯 걸음을 옮겼다. 그가, 내가 준 만원 짜리 한 장을 들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눈물을 떨구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에게 이런 식의 구걸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무의식중에 내 표정이, 내 어투가 그에게 주었을지도 모를 모멸감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자괴감마저 든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곁에 있는 건 나를 축복하기 위함이라 했는데, 내가 도움을 구하는 누군가를 앞에 두고 그를 믿을 수 있을까 없을까를 따지기 시작한 것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금 고등학생이 된 큰 아이는 누구에게나 착하다는 얘길 듣는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사건 하나는 그 아이가 아직 아무것도 몰랐을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신생학교여서 급식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던 아이의 학교에서는 3교시 후에 아이들이 먹을 간식 도시락을 싸오게 했는데, 어느 날 저녁 아이가 갑자기 도시락을 두 개 싸주면 엄마가 많이 힘들겠냐고 묻는 것이었다. 워낙 먹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 양이 모자라서 그런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한 반 어떤 아이의 엄마가 많이 아파서 그 아이는 아침도 못 먹고 간식 도시락도 못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 아이와 나눠 먹으려니 좀 모자란다고, 하나 더 싸주면 그 아이가 미안하지 않게 따로 앉아 먹겠노라고…

 

큰 아이의 마음 씀이 곱고 대견하여 나는 기꺼이, 더욱 정성들여 두개의 도시락을 싸주었다.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의 엄마가 얼른 쾌차하길 바랐건만, 위암을 앓고 있던 그 엄마는 그 해가 저물기 전, 아까운 젊은 나이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할머니와 살림을 합쳐 그 아이가 드디어 사람 꼴을 하고 다니게 될 무렵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