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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치과의사문인회)-단편소설-]수리부엉이(마지막회)/김영진


남새밭 건너 별채 뒤 깨중나무 가지에는 삼촌이 권투연습을 한다며 달아놓았던 검정색 가죽주머니가 모래를 뱃속에 가득 담은 채 쓸쓸하게 매달려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건드리지 않았지만 삼촌의 얼굴이 점점 잊혀져가던 이듬해 초봄 어느 날 스스로 떨어져 없어졌다.
그리고 그 봄엔 대밭 가운데에 있던 커다란 뾰루지 감나무도 갑자기 말라죽었다. 동네 어른들은 엉겨 붙은 대나무뿌리 때문에 감나무가 영양부족에 걸려 죽었을 거라고 수군댔지만 대나무 사이에 군데군데 박혀있던 높다란 사시나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심한 봄바람에 이파리만 살랑댔다.
삼촌의 죽음에 대해 심각한건 항상 나 혼자 뿐이었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삼촌의 죽음과 감나무의 죽음은 보이지 않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만 같았다.


햇빛이 따사롭던 그해 어느 여름날 오후의 일이다. 사립문 앞 회화나무 그늘에는 언제나처럼 시원한 평상이 놓여 있었다. 더위에 지친 나는 평상위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옆에서 두 분의 동네 아주머니들이 고구마 줄기를 다듬으며 나누는 이야기가 고루한 매미소리와 함께 꿈속에서처럼 아련하게 들려왔다.


“남태가 죽고 나서 대밭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대.”
“글쎄, 지난겨울엔 밤마다 시끄러웠다면서?”
“매일 밤 빽 치는 소리가 밤새도록 울렸대.”
“하긴, 남태가 살았을 때 좀 빽을 두드려 댔나! 아마 걘 컸으면 권투선수가 됐을 거야!”
“그나저나 참 불쌍도 하지? 살았을 때 남태 아버지가 너무 구박했었잖아.”
“그러니까 어린 것한테 딴 데서 낳아왔다고 말하면 안됐던 거야. 데려온 자식이라면 누가 부모한테 정이 가겠어?”


“아니 그러면 해마다 생모가 찾아와 대문 앞에서 서성대는데 말을 않고 배겨? 애가 속없이 따라가기라도 하면 어떡하고.”
“참, 그 여편네도 낳아서 주었으면 그만이지 왜 쫓아와서 파토를 내고 지랄이야!”
“말도 마. 더 못 오게 난리를 치니까 삼년 전부터 완전히 돌았대. 작년 봄 황등 장날 갓집 댁이 장터에서 보았대잖아.”
“남태 죽은 건 아나?”


“제 정신이 아니니 알면 또 어쩔 거야.”
“어쨌든 남태는 중학교 가고 나서부터 이상해졌어. 사고뭉치가 되었잖아.”
“걘들 왜 제 어미 미친 일을 몰랐겠어?”
“아휴, 어린 것이 참 안됐지.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하필이면 나이든 노인네들 다 놔두고 그 어린 것이 왜 죽어? 하늘도 무심하지.”
“하여튼 미륵산아래 둘도 없는 비극이야. 돌림병도 이상하지 않아? 염병이라는데 열나고 머리털 빠져가며 아팠던 사람이 있었어? 옆 동네는 고사하고 도내에서 어디 한 군데라도 염병이 돌았냐구!”
“글쎄, 군사정권이 선거 앞두고 생 쑈를 했다잖아…. ”
“염병할 놈들, 지들은 부모자식도 없나…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들이 사람들을 가지고 논다, 놀아!”


“그만해라, 그만! 지서에라도 잡혀가면 어쩔라고…”
“몰라. 잡혀가도 어디 두 달씩 굶은 것만이야 하겠어?”
“아무튼 동네가 작아 잘못 걸린 거래. 이제 그만 잊어버리자, 제발….”
나는 쿵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대문 앞 회화나무 밑을 배회하던 남루한 옷차림의 그 아줌마는 언젠가 나도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본 적이 있었다. 할머니에게 누군가가 대문 앞에서 서성거린다고 말씀드리자 할머니께서는 ‘미친년!’ 한마디 하시고는 말이 없으셨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이 그 여자의 정신이 미쳤다는 것인지, 행동이 미쳤다는 것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 나는 죽은 삼촌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더욱 많아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수리부엉이는 지난 봄 감나무가 말라죽은 뒤로부터 날아오기 시작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 때쯤에 삼촌이 치던 모래주머니 빽도 저절로 떨어져 없어졌다.
달 밝은 밤이면 싸리버섯 같은 나뭇가지사이로 부엉이의 자태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하필이면 한밤중에 뒷간엘 가는 버릇이 있던 나 혼자만이 꼭 그 수리부엉이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