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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수필]설날, 육개장을 끓이며(상)/김경미

둘째가 문득 육개장을 먹고 싶다고 했다. 잠깐 머리 속이 텅 빈듯 하더니 순식간에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시아버님의 생신 때마다 끓여 드리던 쇠고기 육개장의 맛을 이 아이가 아는 걸까. 그럴 리 없다. 그때 이 아이는 그 음식의 맛을 알기엔 너무 어렸었다. 4년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일상에서 아이들을 통해 문득문득 발견되는 아버님의 흔적들… 혈연이란 참으로 깊고 진한 것 인가보다.


고등학교 가사시간에는 간혹 요리실습을 했는데, 실습시간에 한 음식은 아무리 어설픈 솜씨로 주물러대도 신기하게 입에 착 달라붙는 감칠맛이 났다. 나는 집에서 늘 어머니를 돕던 가락으로, 멈칫거리며 맨송맨송 구경만 하던 친구들 대신, 음식재료를 나눠 받는 일부터 고기며 야채를 손질하고 끓이는 일까지를 모두 혼자 도맡아 하다시피 했는데, 그래서인지 요리 실습한 음식들만큼은 모든 과정이 선명하게 뇌리에 각인되어, 어른이 된 후 혼자 손님상 차림을 해야 할 때도 그다지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 가사책은 내 책꽂이에 있었고 실습시간에 내가 해 본 음식만으로도 충분히 화려한 상차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사책에 나온 음식들은 정확히 몇 백 그램의 재료에 몇 큰 술, 몇 작은 술의 양념들이 표시되어 있으니, 그 양, 그 순서대로만 하면 ‘조물조물’ 무치거나 ‘한 소큼’ 끓이는 일들이 낯설지 않았던 내게는, 그 음식들의 맛에 관해서는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여러 실습 요리 가운데서 내가 유독 육개장에 애착을 갖는 것은, 처음 끓여본 쇠고기 육개장이 신기하게도 외할머니의 손맛 그대로였던 까닭이고, 할 때마다 조금씩 맛이 다르게 느껴지던 다른 음식들과는 달리, 어떻게 해도 항상 똑같은 맛을 내주기 때문이었다. 시간과 손이 많이 간다는 점만 빼면 다른 나무랄 점을 찾을 수 없고, 끼니마다 다른 반찬을 찾는 우리 아이들이 두 끼 이상을 다시 찾는 몇안되는 음식인 육개장의 존재를 너무 오랜만에 떠올렸다는 사실은 새삼스럽다 못해 신선한 충격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신정을 지냈으니 설치레는 이미 할만큼 했고, 이번 구정에는 오랜만에 육개장을 끓여보기로 했다. 토란대와 고사리, 숙주나물, 신선한 쇠고기를 사기 위해 가까운 마트를 찾았다. 이미 일면식을 해 두었던 식품코너의 아줌마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토란대? 구정에 토란대를 뭐하게?”
구정 음식을 위한 온갖 코너들이 북적거렸지만 토란대 같은 건 두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두어 군데를 더 돌고도 끝내 구할 수 없었던 토란대 대신 여름에 갈무리해 두었던 우거지를 쓰기로 했다.


대단한 주재료 하나가 빠진 육개장의 맛은 장담할 수가 없다. 쇠고기를 뭉근한 불에 삶아 건져내 식히고 국물을 깨끗한 보에 받쳐 거른다. 데쳐낸 우거지와 고사리, 숙주, 대파와 불린 표고버섯 몇 개를 적당히 썰고 식혀 둔 쇠고기를 먹기 좋게 결대로 찢어 고추장과 고춧가루, 설탕, 간장, 다진 마늘, 참기름으로 양념하고 ‘조물조물’ 버무려 간이 배게 두었다가 걸러둔 육수에 다시 넣어 약한 불에서 ‘뭉근하게’ 끓이면 완성이다. 토란대의 씹는 맛이 약간 아쉬울 뿐, 맛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다. 돌아가신 시아버님 생각이 절로 난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