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7 (금)

  •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문인의 향연/수필]설날, 육개장을 끓이며(하)/김경미 의정부 조은이치과의원 원장


힘든 하루를 보내고 아이를 데리러 시댁으로 가면, 아버님은 종종 나를 기다려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셨었는데, 하루 종일 일어난 주변의 일들을 식탁에서 조잘조잘 얘기하면 때로는 끄덕이며 때로는 맞장구치며 들어주셨다. 4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시던 워낙 해박하신 분이셨던지라 나도 모르게 입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전문용어들을 다른 이들에게 하듯, 말을 끊고 다시 풀어 설명해야 할 일도 없었고, 얘기가 끝난 후엔 그저 재미나게만 풀어낸 내 일상 속에서 “오늘 네가 많이 속상했겠구나…. 툭 한마디 던지시는 말씀이 큰 위로가 되곤 했기에, 어떻게 보면 심히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을 아버님과 단둘이 마주하던 식탁은 오히려 하루의 긴장을 푸는 편안한 자리가 되었으니, 아버님의 부재는 내게도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버님께 서운한 일도 꽤 있었던 듯 한데… 추억이란 이름으로 돌아보는 옛날 일들은 모두가 아련한 그리움일 뿐이다.


육류는 입에도 대지 않으시던 시어머님께선 제사 때가 아니면 거의 고기를 만지지 않으셨지만 아버님은 육식을 즐기는 분이어서, 결혼 후 처음 맞던 시아버님의 생신 상을 챙기며 나는 미역국과 함께 진하고 얼큰한 육개장을 끓여내었다. 너무나 기뻐하시며 곰솥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 육개장을 찾으시던 아버님이 기꺼워 생신 때마다 끓여내던 그 음식은, 그 하루만큼은 미역국의 지위를 능가하는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불과 몇 년간이었을 뿐, 아버님께서 악성근육종양을 선고 받으신 이후 7년여의 투병을 하시는 동안 나는 더 이상 그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 아버님은 수술 후 가능하면 채식위주의 식사를 하기를 원하셨고 의식적으로 육류음식을 피하려 하셨기 때문에 내가 육개장을 끓일 일도 없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4년, 돌아보면 이미 10여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희한하게도 아들이 그 얘기를 할 때까지 나는 긴 시간 동안 내가 그 메뉴 자체를 상차림에서 빼버렸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에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둘째아들이 기억하는 육개장이란 고작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내내 먹었던 음식’에 지나지 않으니 사실 거창하게 혈연을 논할 것까진 없다. 그러나 이해심 깊은 친구 같았던 아버님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 내 스스로 가늠하던 것 보다 훨씬 더 컸음을 느끼게 하는 모티브로는 충분한 것이었으니, 아버님이 좋아하셨던 그 음식은, 내 기억 속에서, 아버님의 영면과 더불어 전혀 다른 세계 속으로  숨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거 끓인 지 십년은 된 거 같네…아버님이 좋아하셨었는데…” 일을 하며 혼자 중얼거리는 나를 남편이 힐끔 쳐다본다.


“엄마, 맛있는데요, 좀 매운 거 같아요.” 아이들이 금새 한 그릇을 비우고 빈 그릇을 채워달라 내밀며 말한다. “그래?. 고추가루가 좀 매워 그런가…?”
다시 맛보아도 분명 그 맛 그대론데 매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 입에는 아버님께서 좋아하시던 얼큰한 맛이 좀 맵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아이들을 위해 가끔 육개장을 끓여야겠다. 손자들에게 너무나 각별하셨던 할아버지 얘기를 함께 나누며 아이들의 추억보따리도 훨씬 풍성해질 것이다.
빈 그릇을 채워주고 다시 앉은 식탁에서 국물 한 숟갈을 뜨려는 순간, 진한 육개장 국물보다 더 깊은 그리움으로 어느새 눈앞이 뿌해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