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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수필)삼수갑산을 가드래도/박용호 박용호치과의원 원장

젊었을 적엔 힘깨나 쓰고 풍류를 즐겼음직한 꾸부정하고 느릿하지만 기골이 장대한 노인의 진찰 순서였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말투나 음색은 변하지 않는 법, 나는 직감적으로 이 노인이 이북 출신임을 알아차렸다.


“내일 삼수갑산을 가드래도 먹어야 사는건대….” 장탄식을 하며 아들이 같이 살지만 형편이 안좋다며 신세한탄을 하는데, 오랜만에 듣는 ‘삼수갑산’에 돌아가신 부친이 떠올랐다. 예전에 많이 듣던 부친의 말 단골메뉴였지만 타인에게서 다시 이 생경한 어휘를 접하니 연민이 앞섰다.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함경남도 개마고원 지대의 군(郡)으로 백두산 서남쪽의 해발 일,이천의 고원지대이다. 바다에서 워낙 멀어 지방 특유의 풍토병이 있으며 화전민이 조, 귀리, 감자 등을 경작하는 한반도 최고의 오지로 알려진 곳이다.
글쎄, 남한 같으면 팬션을 짓고 초원에 웰빙목장이나 골프코스라도 만들었으련만 지금의 북한처지로는 아닐성 싶다.


어렸을 적 어렴풋이 부친의 고조인가 증조 대에 갑산에서 살다가 평생 감자만 먹고는 못살겠다고 환골탈태하는 정신으로 황해도 연백군으로 이주하셨다고 들었다. 고향이 부친과 가까운 연안이었던 어머니는 6·25때 군 장교이셨던 부친을 따라 자연히 강화도 교동섬을 거쳐 인천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후 홀어머니가 되신 후 교육을 위해 다시 서울로 오는 모험을 하셨다.


연말 즈음이 되면 나의 직계 선조들의 이동경로가 꼭 수만 년에 걸친 우리 조상들의 축소판 같은 생각이 들어 감사하기도 하고 겸허한 생각이 든다. 비약적이지만 오래전 우랄 알타이 어족의 한 일파인 용감한 동이족이 양떼를 몰고 더 좋은 초지를 찾아 동쪽으로 이주하다가 한반도에 자리 잡은 것과 흡사하다고 할까. 조상의 뿌리를 찾아 아프리카의 오지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는 미국의 유명작가가 이해된다. 지금도 여기선 빡빡해서 못살겠다고 캐나다로 뉴질랜드로 동남아로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속에는 면면히 흐르는 개척정신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말 한마디에 자극되고 천냥 빚을 갚고  격려되고 고무되는 법이지만 이북 실향민이 즐겨 쓰는 ‘내일 삼수갑산을 가드래도…’에는 비장함과 자조적인 마음이 깔려있다. 그러니까 절박한 심정에서 해먹을 것이 없어 주인 없는 오지에 들어가서 산에 불지르고 그것을 거름삼아 밭이나 갈아먹고 살지언정, 꼭 할 것은 한 뒤에 가야겠다는 결의가 새겨져있다. 좋게 보면 내일 최악의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하고 싶은 중요한 일은 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만족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이날, 아무래도 돈이 없어 틀니를 못하고 간 그 노인네가 마음에 걸려 직원을 통해 전화를 넣도록 했다. 아무리 딱해도 그냥 해줄 수는 없고, 보건소에 무료틀니를 해주도록 소개장이라도 써줄 심산이었다. 아들이 받았다고 하는데 한번 더 나오시라고 말씀을 드려 놓았다고 했다. 직원도 그 노인네의 말하는 폼새가 인상적이었는지 흉내를 내고 안된 표정을 한다. “아유~키도 크고 멀끄름한 분이… 아들이 있어도 소용없나 봐요….”


“그 직원도 결혼한지 얼마 안돼 시부모를 모시고 와서 틀니를 해드렸는데, 틀니 없이 지낸다는게 영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이다.
“그런데, 미스 장, 그 노인네 말하는 중에 삼수갑산이란게 무언지 아나?” 느닷없는 나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그거 무슨 한정식집 이름 아니예요?”
그 노인네는 아직 연락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