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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시]이재윤/세월의 허리


세월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내 앞을 스쳐 지나갔지요.
세월이 나를 향해 머리를 내밀었을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요.
그 단단한 이마가 거침없이 나의 앞을 스쳐가고 내가 세월의 애교스런 눈 가장자리를 지날 때 나는 여섯 살 나이였습니다.
세월의 눈이 나에게 윙크를 할 때 처음으로 그 존재를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때는 세월의 흐름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그때 나보다 세 살 위의 형님은 그 높은 코 위에서 뽐내며 나를 내려다 보고 계셨고, 열 다섯 살의 맏형은 빙그레 웃는 세월의 입술 위에서 탄력있는 육체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던 게지요. 어서 세월이 흘러서 나도 세월의 탐욕스런 붉으레한 입술 위에 올라보고 싶었지요.


세월을 재촉하다 보니 나는 어느새 세월의 턱에 도달해 있었지요.
낭떠러지 저 밑에 세월의 목이 위태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나는 아찔했습니다. 고된 훈련으로 시작된 3년 간의 군대생활은 바로 그 세월의 목이었지요.
나는 달력에 매일 날짜를 동그마리 해가며, 세월의 목을 탈출해서 저 넓은 가슴팍에 도달하기 위해 매일을 무사하기만 빌었지요.

세월의 가슴팍에 도달했을 때는 넓고 자유스러운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나는 평원을 찾아 헤매던 유목민처럼 넓은 세월의 가슴팍이 지닌 풀잎 위를 맘껏 뛰놀았지요.
그 푹식한 젖무덤을 향해서 아직도 더 올라갈 곳이 있다는 희망으로 융단 깐 그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밟았습니다.
그러나 예전같이 성큼성큼 걷지는 못하고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기어올라갔습니다.
세월의 정상이 너무 빨리 올 것 같은 조바심도 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나이 사십에 드디어 세월의 정상 젖꼭지에 올라섰습니다.
여기서는 세월의 앞과 뒤를 완전히 볼 수 있었지요.
지나온 길은 참으로 색깔이 다양했습니다. 빛나는 이마, 검은 눈동자, 내가 모르고 스쳐 지나와 버린 공원의 벤치 같은 귀,  그리고 붉은 입술들이 어제 일처럼 환히 보입니다.

 

세월의 정상 젖꼭지에서는 세월의 앞도 훤히 잘 보입니다.
길은 훨씬 평탄해졌고 젊을 때처럼 낭떠러지나 모진 바윗길도 없어 탄탄한 대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따금은 세월의 배꼽 같은 함정도 있고 세월의 60고개에는 영원히 떨어져 버릴 세월의 폭포수도 있습니다.
세월의 40대나 50대에서 방향을 잘 잡아 튼튼한 다리 위를 건넌다면 백수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아직 내가 서있는 곳은 세월의 정상인 세월의 젖꼭지입니다.
아직도 배는 따뜻하고 힘이 있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인생 50은 세월의 허리, 아직 든든하고 미끈한 그 세월의 허리를 꼭 잡겠다고. 그리고 그 세월의 허리는 영원히 놓지 않으리라고. 세월의 둔부는 너무 굵어 안을 수가 없고, 세월의 다리는 너무 완강하고 차가워서 나를 냅다 걷어 찰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내 나이 스물 셋에 세월의 목을 꼭 쥐었어야 했는데, 그저 세월의 목을 뛰어넘으려고만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기회인 세월의 허리는 절대로 놓치지 않으렵니다.
나는 매일 아침 저녁 운동을 합니다. 세월의 허리가 좀더 가늘어지도록.
그래서 세월의 허리를 더 꼭 쥘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