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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수필]박용호/출혈 환자와의 대화

경찰병원 인턴 애송이 시절, 한 오십대 남성이 윗입술과 인중부위가 잔뜩 부어서 내원했다. 한창 겁 없이 배우던 시절이라, 치근단 농양으로 진단하고는 기회라 생각하고 바로 절개, 배농 시술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다음날 출근하니 지난 밤 응급실에서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출혈이 멎지 않는다고 치과인턴을 콜 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아 과장님이 직접 가셔서 응급처치를 하셨다고 한다. 혈액검사 결과 혈소판 수치에 문제가 있어 내과로 응급 입원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불안했다.


며칠 후 환자 가족들이 치과로 몰려왔다. 경험 없는 인턴이 잘못해서 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잠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과장님이 “인턴이 치과에서 절개를 한 덕분에 그간 모르고 있었던 백혈병이 발견되었는데 감사하지 못할망정 무슨 소리냐”며 의연히 나서자 간신히 진정되었다. (환자는 내과에서 thrombocytopenia로 판명되었다) 변 과장님이 따로 조용히 부르시더니, “ 닥터 박은 아무 잘못한 것이 없으니 걱정 말게.” 긴장하고 의기소침해 있던 나를 격려해 주셨다. 과장님은 지금도 대전 을지병원에서 정정히 환자를 보고 계신데, 항상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어쨌든 큰일을 쳤으니, 시간이 날 때마다 병실에 환자 가족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후처치를 한다고 올라갔는데 찜찜하고 낙오된 패잔병 신세였다. 삼사일이 지나도록 절개 부위에서 출혈이 멎지 않는 것이었다. 지혈압박, 냉찜질, 보스민 거즈에 젤폼까지 한답시고 생각나는 것은 다해보았지만 허사였다. 노이로제 지경이 되어 transamin을 하루 네 차례 주사하고 이틀 후 재봉합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무식하면 용감해진다고, 그 주사약은 정형, 신경외과에서 수술 후에 관행적으로 쓰던 것이었는데, 비타민 K 아니면 다른 종류의 지혈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고 올바른 처방이었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다행히 출혈이 멈추어 고역은 끝났다.
그 사건이 잊혀질 무렵인 몇 달 후 내과선생에게서 우연히 그 환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가슴이 뜨끔했다.


다행히 별일은 없었지만 개업의 입장에서 당했다면 의료사고로 진저리를 쳤을 사건이었다. 그 후 “시리다, 떨어졌다, 밤새 피나왔다”는 소리는 제일 듣기 싫은 말이었는데, 그간 발치 후 출혈에 대한 실제괴담도 많이 들었다. 간경화 환자가 발치후 그날 밤 베겟니를 시뻘겋게 물들이고 죽었다든지, 발치와 동시에 뇌동맥류가 터져 그날로 즉사하는 바람에 부검에도 불구하고 수천만원을 물어주었다는 선배, 사랑니를 빼다가 하치조관이 터져 입안 가득히 피를 머금은 채 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는 동료, 설동맥이 터져 혈관을 잡을 수가 없어 수혈을 몇 차례나 하고 위기를 넘겼다는 사례 등등. 그 때 하~도 데어서 지금도 피가 안 멈춘다고 하면 신경이 쓰인다.


일반적인 피에 대한 정서는 생명, 죽음, 희생, 노력 그리고 공포감 경외심 등인데, 붉은색을 선호하는 중국인이나 보혈(寶血)의 심성이 녹아있는 기독교 문화권의 서양인에 비해 한국인은 공포감을 쉽게 연상하는듯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장수·관리의 도포가 붉은색이라든지. 청사초롱에도 붉은색을 쓴 것으로 미루어 무·관·민의 권위를 상징하고 악귀를 배격하는 역할도 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원한 등이 골수에 사무친다’는 표현으로 보아 피가 그토록 생명의 영위에 중요하고 더욱이 피를 생산하는 곳이 골수였음을 어렴풋이 알았음직하다. 또한 혈맹, 혈서, 혈연, 혈통 등의 의미가 각별한 것으로 보아 피를 귀중히 여기는 ‘관계사회’의 면면이 엿보인다. 피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리해도 특별한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피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심성’ 때문에 출혈에 대한 대화는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다. 이상 출혈 시 귀찮은 나머지 서둘러 마무리 지으려고 ‘침이 섞여 많아 보이지 별것 아니다’ 는 투로 넘어가면 환자는 불안을 느낀다. 추정되는 가능한 원인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직업상 매일 피를 대하는 치과의사들은 시술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