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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수필]빈손/이재호

가을에는 낙엽지는 거리를 걸어 볼 일이다. 플라타너스 낙엽이 발등에 떨어지며 길을 막더라도 발길로 차지 말아라.


소멸하는 것에는 관대한 것이 좋다. 그대도 낙엽처럼 소멸할 존재가 아닌가.
은행잎이나 작은 낙엽이 옷깃으로 스며들거든 모르는 체 하지 말고 그들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소멸하는 것들의 마지막 말은 들어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늦가을 설악산 성국사 앞을 지나는데 큰 오동잎 낙엽 하나가 발길에 차이며 길을 막았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단풍처럼 핏빛으로 곱지도 않고 크기만 크고 거무튀튀한 오동낙엽이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돌담길에 앉았다. 낙엽은 말없이 바람에 흐늘거리는데 싸늘한 바람을 타고 목탁소리와 설법소리가 들린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하숙생이라는 유행가에 나오는 가사와 같다.
구슬픈 소리의 이 노래를 들으면 가을이 더욱 다감해 지고는 했었다.
유행가 가사라 우습게 생각하면 안된다. 이 말은 불교에서 중생들을 일깨우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법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빈손으로 온다지만 왕자의 빈손과 노예 자식의 빈손이 같을 리 없다. 빈손으로 간다는 것도 윤회를 이야기하고 업보를 말하는 불교의 생사관하고는 모순이 된다.
불법에서는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편법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생물학자 리처드 토킨스는 인간 개체는 유전자를 운반하는 바이오 로봇에 불과하다고 설파한다. 생명의 진짜주인은 유전자이고 우리의 형상은 포말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운반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953년 인간의 유전자라며 비비꼬인 나선형의 모형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생명의 설계도, 생명 개체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유전자. DNA를 구성하고 있는 염기 서열이 반세기만에 완전 해독되었다. 네 개의 분자가 위치를 바꾸어 가며 배열되어 있는 DNA의 길이는 무려 천억 Km에 달한다고 한다. 길고 긴 설계도이며 생명의 모든 것이 기록된 필름이다. 지구의 길이가 4만Km이니까 지구를 250만 바퀴를 돌만한 길고 긴 필름. 이 필름에는 우리 조상들의 모든 것들과 미래의 후손들의 형상이며 정신이 들어있다.


인간의 유전자는 30만개 정도인데 실제로 유전에 사용되는 유전자는 3만 내지 5만개라고 한다. 나머지는 창고에 보관된 쓰레기 비슷한 것인데 이 속에는 조상들의 역사와 기억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참나무 유전자도 있고 물고기 유전자도 있고 재난의 아픈 역사. 두려움, 환희와 같은 기록들이 지워지지 않고 몇 만대 몇 천대를 걸쳐 면면히 흘러 내려오고 있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뱀을 무서워한다. 뱀에 물린 적도 없고 뱀을 본 적도 없이 자란 도시의 어린이들도 뱀을 보면 무서워한다.
그것은 빙하기가 끝나고 열대 우림이 지구를 덮고 있을 때 우리 조상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것이 뱀이었다.


빙하기시대에는 탁 트인 툰드라 지대에서 들소며 사슴을 사냥하던 용감한 조상들이었지만 밀림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허리를 휘감으며 혀를 날름거리는 아나콘다와 같은 큰 뱀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때의 공포감이 유전자에 기록되어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백화점이나 할인점에 가서 열심히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담는 것을 보노라면 구석기 조상들이 수렵 채집하는 것이 연상된다.


바람기가 있는 남자들은 혼음기의 유전자가 강력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며 낚시광의 조상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살았을 것이다.
우리의 피 속에는 과거도 있고 현재도 있고 미래도 있다. 전생을 알려고 애쓰지 말아라. 내생에 대해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현재에 내생이 있다.
봉건시대 신분사회 때에는 혈통에 따라 인간이 구분되었다. 왕족의 피도 있었고 귀족의 피도 있었고 천민의 피도 있었다. 왕족 중에도 고약한 유전자를 가진 피도 있었을 것이고 천민 중에도 고귀한 피를 가진 혈통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들이 구분한 혈통은 믿을 것이 못된다.
인간의 정신은 5%의 의식과 95%의 무의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