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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수필]이재호/빨간 스웨터(상)

중요한 약속까지 깨면서 국민학교 동기회에 참석하기로 작정한 것은 캐나다에 이민 가 살고 있는 동기생의 향수병 때문이었다.
이민 간 지 20년 가까운 이 친구로부터 국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봄부터였다.
국민학교 때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자기 집에 키우던 강아지 한 마리를 우리 집 마당에 매어 놓고 떠난 지 십 몇 년 동안은 연하장 한 장이 고작이었다.
“이 개 잘 키워.”


약간 젖은 듯한 목소리로 악수를 나누고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돌아보며 눈시울을 적시던 친구로서는 무심한 일이었다.
요 몇 년 사이에 연하장 사연이 길어지더니 드디어 국제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 “나이 드니 고향이 그리워지는구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가 이틀에 한 번씩 국제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할 때는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꽃이 피었느냐, 진달래를 보았느냐, 보리는 얼마나 자랐느냐.”
아무리 통신이 발달되었다 해도 거기가 어딘데…. ‘아하, 이 친구 향수병에 걸렸구나.’ 향수병도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우리는 세월의 지층에 묻혀 흔적도 희미한 옛일들을 비싼 국제 전화통에 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가 좋아하던 여학생 이야기, 여학생 고무줄만 전문으로 끊고 다니던 심술쟁이의 근황, 그 친구는 희미한 옛일들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말하고 있었다. 향수병에 걸리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고향길에 접어들어 구름에 가린 옛 산, 옛 언덕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옛 일, 옛 얼굴들이 낡은 영사기의 화면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보통 고향에 올 때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향수병이 심하면 옛 일들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슬픔 같은 그리움을 느꼈다.
어떤 얼굴로 어디를 헤매다 돌아와 있을 것인가?
43년 전에도 지금과 같은 느낌을 가진 적이 있었다.


우리가 국민학교 입학한 때는 1950년 봄이었다. 일제시대부터 있던 상주국민학교에서 분교되어 상영국민학교가 개교한 것이 1949년이었으니까 우리가 2회가 된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5년. 어수선하고 가난했던 시대이었지만, 폐허가 된 제사 공장을 학교랍시고 학생들을 받기 시작한 것은 너무한 일이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검고 음울한 건물, 공장 폐품이 여기저기 뒹굴고 석탄 찌꺼기가 널려 있는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가졌다. 초라하고 우울한 입학식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43년이 지난 지금에도 늘 신선한 느낌을 들게 하는 입학식이었다. 검고 음울한 건물을 배경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담임선생님은 빨간 스웨터를 입은 여선생이었다. 스물 몇 살쯤 되었으리라.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예쁜 얼굴에다가 하얀 블라우스, 빨간 스웨터. 바래지 않은 사진처럼 지금도 선명하다.


경이의 눈으로 쳐다보는 우리들을 선생님은 찬찬히 뜯어보았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아이들답게 얼굴은 마른버짐 투성이였고, 다 해진 무명바지, 학생복 같은 것을 입고 있어도 여기저기 기운 것이 보통이었다.
까만 고무신, 좀 더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해진 고무신을 새끼줄로 칭칭 묶고 있었다. 기계충으로 지도 모양 머리카락이 빠진 때 묻은 제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하던 따스한 눈길 때문에 우리는 행복했었다.
교실이 없어 운동장에서 가마니를 깔고 수업하면서도 우리는 낄낄거리고 장난치고, 목소리를 높여 “영이야” “철이야”를 외치고 있었다. 운동장 저편에서는 개나리가 피고, 보리이랑에는 뻐꾸기 소리가 일렁거렸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