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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수필]이재호/빨간 스웨터(하)

<1581호에 이어 계속>


6월에 전쟁이 났다. 담임선생님은 쳐들어온 공산당을 모조리 쳐부수고 북진 통일을 한다고 했다. 우리는 고함치며 좋아하고 무언지 모르면서 ‘북진 통일’을 외치고 무언지 모를 군가도 불렀다. 7월 초순까지 우리는 그렇게 보냈다. 칠월 중순에 접어들 무렵 인민군이 상주군 근처까지 왔다는 어수선한 소리가 들리고 ‘안심하라, 북진 통일’한다고 확성기를 달고 떠들던 지프차도 보이지 않더니 담임선생님은 내일부터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피난길 주의 사항을 말하고 울음으로 끊기다 이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꼭 다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무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헤어졌다. 일고여덟의 작은 육체를 가지고 전쟁의 포화 속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전쟁 기록 영화를 보노라면 포화 속에서 남루한 옷차림으로 울고 있는 어린이가 바로 우리들이었다.


다시 학교 문을 연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폭탄으로 여기저기 부서진 철길을 따라 학교로 갔다. 일 년 전 그때처럼 보리이랑은 바람에 하늘거리고 무심한 뻐꾸기는 철모르고 울고 있었다.
“누구누구가 돌아와 있을 것인가!”
아직 피난에서 돌아오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친구도 있고 더러는 다쳐서 못 오는 친구도 있었기 때문이지만, 스물 댓 명, 한 학기 동안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어도 오십 명이 약간 넘었다. 백이십 명이던 두 반이 한 반으로 편성되었고 육학년까지 학생 수가 가장 적은 학년이 되었다. 동기 여학생이 용케도 간직했다가 가지고 온 한 장짜리 졸업 사진에서 세어 보니 58명밖에 되지 않았다.


한 살이 더 먹어도 더 작아진 체구. 그 어린 나이답지 않게 죽음을 보아야 했고 굶주림에 떨던 우리들의 눈동자 속에서 금간 구슬처럼 상처투성이들이었다. 그 나이답지 않게 영악해져 있었고 더러는 말을 잊고 있었다.
곧 돌아와야 한다던 담임선생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이북으로 붙잡혀 갔다고 하기도 했다.
다시는 그 순결한 색깔의 빨간 스웨터를 볼 수가 없었다.


빗속 저 너머 모교의 건물이 보였다. 그 후 우리 어린 손으로 모래를 나르고 터를 닦아 지은 건물은 보이지 않고 현대식 4층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모임 장소로 정해진 식당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떤 얼굴로 다시 돌아와 있을까?
그날 모인 동기생들은 열 명이었다. 두서너 명 빼고는 낯설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옛 얼굴이 떠오르기는 해도 낯설은 얼굴들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 돌아가며 이름을 부르고 복사해 온 작은 졸업사진을 보며 웃고 떠들었다.


“왜 이렇게 적게 모였지?”
“보통 사람들은 다 죽고 독한 놈들만 살아남다 보니 그렇지.”
죽은 동기생들이 열 명을 넘었다. 그 작은 몸뚱어리로 그 모진 포화 속에서 살아남은 그들이었지만 급격히 변하는 시대 속에는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멀리 가 있고 더러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내년에는 열다섯 명을 모을 것이라 했다.
천둥소리가 나고 빗물이 창문에 흐른다. 우리들의 세월처럼 우릉우릉 천둥이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