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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소설]땅과 바다의 어름/신덕재

“재복아!, 갯바당에 안가면 낭구나 해 오라우야!”
홑창 같은 벽을 사이에 두고 안악댁의 질정(質定)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름 때면 찾아오는 보름치의 매서운 추위로 냉골이 다 된 방바닥에 골판지처럼 딱딱한 이불을 뒤집어 쓴 그는 안악댁의 소리가 성마르긴 해도 자식에 대한 깊은 열정과 강한 욕구와 삶의 끈끈함을 나타내는 소리로 들렸다.


지금 그녀의 속마음은 재복이가 정말로 나무를 해 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학교는 고사하고 성경 구락부라도 다닐 수 있게 되고, 청량산 꼭대기에서 내리지르고 송도 앞바다에서 치켜 지르는 매서운 된바람을 막을 따듯한 옷과 허기진 배를 채워 주고 싶은 소박한 모정의 욕구라 생각됐다.
“백장 놈의 새색기들은 할 일 없이 갯뱅장에다 지름을 들어 부을 일이 어데메 있단 말이야. 비러먹을 놈들 같으니라구.


소리개(松峴里) 아자씨!
오날도 조반 안 드실 작정이 왜까? 장창 자빠져 잠만 자면 어드러케 하갔시요. 몸도 성치 아느맨서 끼니를 거르면 되갔시까?
아자씨, 빨리 오시라요. 진장짠지를 새로 내왔으니 먹어 보시라요. 날이 차서 짠지 맛이 제대로 나느만요.”
안악댁의 기름 얘기를 듣고 그는 보름 넘게 조개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군용 기름을 실은 유조선이 겨울바람에 좌초가 되어 송도 앞바다를 검게 물들였던 것이다.
해안선을 따라 세치 두께로 덮여 있는 기름을 퍼내느라고 동네 고샅마다 때 아닌 소동이 벌어졌다.
예기치 않았던 이 기름은 궁핍한 피난 생활에 횡재였으며 생각지도 않았던 수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추운 날 발등에 오줌을 싸는 어리석음이었고 소탐(小貪)에 즐거워하는 우둔함이었다.
인천상륙작전 때 비 오듯 퍼부어 댄 함포 사격은 이름 그대로 깨끗하고 맑으며 조용한 청량산을 초토화시켜 너덜겅만이 있는 민둥산으로 만들고 말았다.
날물이 되었을 때 송도 앞 바다의 갯벌은 기름 때문에 청량산처럼 처참하게 되었다.
갯벌에 흔하게 깔려 있던 칙게는 시커먼 기름을 뒤집어쓰고 눈망울을 허우적거리며 긴 다리를 버둥대고 있었다.


칙게 구멍마다에는 기름띠가 덮여서 무지개 빛깔의 피막이 형성되어 있다. 원폭(原爆)의 폭풍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쓸어 없애고 계속적으로 고사시키듯이 기름띠도 송도 앞 바다의 모든 생명체를 죽이고 송도 사람들의 생활 터전을 앗아갔다.
기름의 독성을 생각하다 그는 들물때마다 검은 성엣장과 함께 밀려오던 망둥이, 밴댕이, 숭어, 전어 등 죽은 물고기 떼의 상한 냄새로 속이 메스꺼리고 목울대가 울컥 추켜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날래 오시라는데 와 이래 지체 하는거 왜까? 밥은 떠뜻할 제 먹어야 살루가는 법이 야요. 빨리 어서 건너 오시라요.”
안악댁의 성화가 전과 다름없다. 그는 굼벵이처럼 이불을 빠져나와 두 손으로 부스스한 머리를 두어 번 쓸어 올렸다.


보름치에는 날씨가 맑고 매서운 법인데 오늘 아침은 잠록한 게 눈이 올 것만 같다. 이런 날이면 더욱더 도지는 다리의 통증을 무딘 감각으로 느끼며 그는 안악댁의 방문을 열었다.
재복이는 벌써 아침을 먹고 나갔는지 없었다. 그는 면구한 생각에 몸을 움츠린 채 앉은걸음으로 상머리로 갔다. 그녀의 말대로 김장김치의 맛이 날씨에 걸맞게 시원하여 입안 전체에 감친다.
포기김치가 아니고 무와 배추를 함께 썰어 새우젓에 버무린 짠지였지만 새콤하고 산뜻한 맛이 일품이다.


“저놈의 지름배는 언제 없어진답네까? 어서 없어져야 갯바당에 나가 조개를 캐던가 말던가 할 것 아니갔시요.
저놈이 저러케 버티고 있으니 돈꽁댕이를 맨질 수가 있어야지요. 이제는 보리쌀도 매칠 안 남았는데 어드러케 살란 말인지 도무지 모르갔시요.
에이 쌍놈의 양코뱅이 새색기들이라구!”
그는 안악댁의 험구를 한 귀로 흘리며 엉거주춤 일어나 낫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