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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땅과 바다의 어름 ( 7·끝 )/신덕재 서울중앙치과의원 원장

<1595호에 이어 계속>


“소리개 아저씨, 장고개 큰 소나무에 재복이 엄마가 있어요.”
침쟁이 할아버지의 손자가 무서움에 떨면서 말했다.
그는 장고개로 급히 향했다.
어스름이 더해가는 장고개에는 큰 소나무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큰 소나무는 이내 기운이 서려 침침하고 음울해 보였다.
그는 무서움증과 두려움이 앞섰다. 이런 공포와 걱정이 현실로 나타났다.
결국 안악댁은 갔다.


그녀의 죽음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었다. - 전쟁, 재복이의 죽음, 찌든 생활, 암울한 미래.
어느 것 하나 확실한 해답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져 돌아가는 지금의 세상이 그녀를 데려 갔는지도 모른다.
그녀에 대한 못다 한 마음의 정이 그의 가슴에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녀가 없는 그녀의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궤짝 위의 베개를 보았다.
베갯모에 빨간 자수의 수(壽)자와 복(福)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정신을 잃었을 때 몸 구완을 하면서 그녀가 하던 말이 글씨와 함께 어우러져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베개는 큰 뜻이 있는 것이야요. 재복이 아바이가 인민군에 끌려가기 전에 써 준 글자인데 내가 수를 놓은 것이야요. 복되게 오래 오래 살자는 뜻이지요. 그런데 한번도 베보지 못하고 지금은 어드러케 되았는지.”


상념에 잠긴 듯 먼데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참으로 이상도 하지 안카시오. 소리개 아자씨가 이 베개를 처음 베게 되었으니 말이 왜다.”
아직도 그녀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그는 베개를 꺼내어 부둥켜 안았다. 눈물이 났다. - 오래 오래 복되게 살자더니.
그녀에 대한 못 다한 마음의 정이 물밀듯이 밀려 왔다.
낙조의 역광을 받으며 바다에 나갔던 사람들이 힘겨운 하루의 일을 마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점점이 떠있는 섬들 사이로 떨어지는 살찐 단호박 같은 태양은 그들의 지친 모습과 달리 평화롭고 한가로워 보였다.
그러나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그들은 낙조의 아름다움이나 황혼의 멋을 감상하거나 느끼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오직 그들에게는 살아남는 것만이 전부였다.
“아니, 이게 누구여? 소리개 아저씨 아니어?”
맨 먼저 나오던 어촌계 감찰 아저씨가 놀란 듯이 외쳤다. 둑 머리에 쓰러져 있는지 꼬꾸라져 있는지 알 수 없게 그가 쓰러져 있었다.
“이거 죽은 거 아니어?”
뒤 따라 오던 침쟁이 할아버지가 걱정스럽게 그를 보며 말했다.
“움직이는 걸 봐서는 죽진 않았는데요.”
누군가가 말했다.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그는 머리를 힘들게 들어 올렸다.
“아니, 이 사람아, 아무리 세상이 살기 어렵고 힘들어도 목숨을 중히 여겨야지, 마구 몸을 휘 둘리면 되겠는가? 정신 차리게, 일어나 빨리 가세.”


침쟁이 할아버지가 그의 몸을 일으키려 하자 뒤에서 누군가가 빈정대듯 말했다.
“그만 두세요. 데려 간들 끼니가 있겠어요, 아니면 누가 돌봐 주는 사람이 있겠어요? 안악댁이 죽은 후부터는 저렇게 매일 돌아다니기만 하는데요.”
“그래도 사람은 살려야지!”
“저 사람이 죽는 것을 겁내나요. 우리네완 생각이 틀려요.”
“이 사람들아, 시끄러! 어서 부축해 동막으로 데려 가세!”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둘러 선 군상들 사이로 비치는 낙조를 바라보며 희미한 의식 속에서 그는 외쳤다.
“당신들과 나는 다른 게 없소.
우린 다같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소.
내가 방황하며 죽어가고 있는 줄 아시오?


아니오.
다만 당신들이 살아보지 못한 곳을 찾고 있는 중이오.”
그의 외침은 아무도 듣지 못하는 외침이었다.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다.
“이 사람들아!  어서 데려 가세!”
“쓸데없는 일이에요. 데려다 놓으면 내일 또 큰 소나무다, 쓰레기장이다, 동막이다 하면서 게걸스럽게 돌아다닐 텐데요.”
희미해져 가는 발소리 뒤로 붉은 바다가 너울너울 춤추고 시선의 끝머리에는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