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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향연-수필-치과의사문인회 작]선비정신/이재호 대구 이채호 치과의원 원장

우리 마을에 양복 입은 외지인이 찾아 왔다. 찾는 분이 집에 계시지 않아 일하는 논으로 모셨다.
누가 찾아왔다는 전갈에 김 생원이라 불리는 동네 아저씨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집으로 모시고 가서 사랑채에 잠시 계시라고 전하거라” 했다. 김 생원은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도포까지 갖춘 후에 사랑으로 나가 큰절로 손님을 맞았다.
자기를 찾아 온 손님에게 흙 묻은 옷이며 몸가짐을 보이지 않겠다는 선비다운 처세였다는 기억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 선고의 친구들은 만나면 큰 절 인사하고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선비의 도시 대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것을 보면 선비는 아직도 우리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선비정신 - 고결한 인품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정말 그럴까? 송강 정철의 시는 감성이 넘친다.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을 적신다. 그러나 정여립 사건 때 그가 보여준 잔혹함을 보면서 글과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고 허탈감을 느꼈다.
중종 때 명현들을 죽이거나 내쫓는 일에 능력을 발휘했던 김안로의 시를 안대희가 지은 ‘선비답게 사는 것’에서 읽고 선비는 무엇이고 선비정신은 무엇인가 하는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의 장원 시 ‘그네’는 서정이 넘치는 명시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이 음모로 문정왕후를 내쫓고 그 많은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몸가짐이 단정하고 행동이 근엄한 김안로는 조선 선비의 외모였다.
그 선비라 자칭했던 양반들의 붕당정치 행각을 보면 우리 민족사의 암흑기라 할 수 있는 조선의 선비 정신을 무조건 동경하고 따라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어느 일요일, TV에서 즐겨보는 진품명품 시간에 ‘남인보’라는 족보가 나왔다. 남인들끼리 만든 족보였다. 당이 틀리면 여자들의 머리 모양도 틀리고 옷매무새도 달랐다.
자기 당만 옳고 남의 당은 무조건 배척했다.


임진왜란 전, 일본에 파견되었던 학봉 김성일은 정사 황윤길에 반대하여 침략의 징후가 없다고 했다.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언제인가 학봉의 후손되는 분에게 우리나라의 뛰어난 선비로서 후세까지 추앙받는 학봉 선생이 과연 일본의 침략기미를 몰랐을까 하고 물어 본 적이 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학봉같은 영민한 분이 그 기미를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 임란으로 삼백만이 넘게 죽었고 국토는 초토화 되었지만 학봉은 벼슬을 유지했고 후세에 추앙을 받았다. 그때 동인 세력이 우세했고 정권을 잡고 있었다.


중국 송나라에서 전해진 윤리학에 불과한 성리학이 우리나라에서 탱자가 되어 성리학 이외의 학문은 모든 게 잡학이었고 이단이었다. 그 결과 국민은 가난하고 문명은 발달하지 못했다.
처음 미국 뉴욕에 갔을 때 1850년경에 개통되었다는 지하철을 타면서 우리의 선조들, 조선의 선비들을 다시 생각했다.


그 때의 조선시대 사진을 보면 초가집이 다닥다닥 붙은 좁은 거리에 양반들이 하인을 앞세우고 “대감 납신다. 물렀거라”하는 호통소리에 굶주리고 남루한 옷차림의 백성들이 엎드려 있는 풍경이었다. 그 결과가 그들의 후손들이 나라를 잃고 풍찬노숙하면서 만주벌판을 헤매였고 배 주리며 매 맞고 살았다. 글씨 잘 쓰고 시 잘 짓고 행동이 선비다웠던 이완용은 호화롭게 살았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많은 땅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선비정신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을 으뜸으로 여긴다. 도끼를 들고 대문 앞에 나아가 상소하는 게 그들의 긍지였고 타협하는 것은 비굴이라 여겼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을 때 이십만의 청군에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선비의 오기는 죽지 않았다. 강화를 주장하는 최명길은 주전파에게 소인이며 역적이라고 심하게 모욕 당했다. 강직한 선비는 죽어도 오랑캐와 타협 않는다는 그들은 그 후에도 선비로 추앙받았다.


그 때 조선의 군대는 만 사천이었고 약간의 화포가 있었지만 청은 명을 멸망시킬만한 우수한 화포와 이십만 대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