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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향연-수필-치과의사문인회작]축제/이재호 이재호치과의원 원장

이 년 전부터 앞산을 자주 오르내린다. 건강을 돌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등산의 즐거움을 늘 부러워하던 터였다. 앞산이 대구 도심에 위치해 있으니까 공원 정도의 야산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서울 남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고 웅장하다. 골도 깊고 수목도 울창하여 어느 명산 못지 않다.


고산골을 오르내리면서 내가 모르고 있던 많은 꽃이며 풀이며 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생명들의 이름을 이토록 모른다는 나의 무식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잡다한 지식으로 머리를 채워 넣었지만 꼭 알아야 할 것들은 모르고 있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산에는 늘 축제가 열리고 하루도 같은 날이 없이 늘 새롭게 변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즐거운 축제, 티 없는 환희의 축제가 화려한 개막식을 하고 내년을 기약하는 멋진 폐막식을 끊임없이 진행하고 있는 산속의 세상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그들의 축제에 참가하여 함께 노래하고 환희하고 감격할 만큼 내 마음이 열려있지는 않지만, 어렴풋이나마, 아주 희미하게나마, 산속의 축제를 느낄 수는 있다.


영국의 BBC방송에서 제작한 ‘식물의 사생활’은 내게 무척 감동을 주었다.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생존을 위해 투쟁도 하고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온갖 지혜를 쓰는 것은 동물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 후부터는 꽃잎 하나 나뭇가지 하나를 꺾을 때도 망설여지고는 했다.


내가 자주 다니는 고산골 입구에 있는 벚꽃 터널의 축제는 사치스럽기 그지없다. 어느 여왕의 보석이 이보다 찬란하고, 어느 공주의 옷깃이 이보다 화사할 수 있을까? 눈부신 환희, 꽃피움의 감격으로 목청 높여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며칠이 지나면 낙화되어 땅 위에 뒹굴다 사라져야 할 운명을 슬퍼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지 자연의 일이 아니다.


‘너무 짧은 꽃피움이기에 저런 사치를 허용한 모양이지. 자연은 늘 공평하지.’ 중얼거려 보며 산을 오르지만 이런 중얼거림도 인간의 일일 뿐, 벚꽃은 얼굴을 간질이는 바람에 까르르 웃고 앵앵거리는 꿀벌을 화사한 두 손으로 유혹하고 있다. 벚꽃이 눈처럼 낙화하는 슬픔도 잠깐 여기저기서 진달래의 붉은 저고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봄도 무르익어 뻐꾸기가 울기 시작하고 다람쥐는 신이 나서 나무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한다. 나비들은 이 꽃 저 꽃을 희롱하며 날갯짓을 뽐내고 꿀벌들의 앵앵거리는 소리가 축제의 흥을 돋운다.


‘몇 달이면 죽어 흙이 될 저 나비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울까’ 그래도 나비는 즐겁고 꿀벌은 신이 나 꽃 사이를 누빈다. 천변 휴게소에는 낯익은 노인 서너 분이 앉아 계신다. 무표정하고 지친 듯한 주름, 피로한 두 어깨가 어쩐지 축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명의 환희와 꽃피움의 감격으로 온 산속이 떠들썩한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래도 축제는 계속된다.


모란이 지면 그뿐, 봄이 다 갔다고 슬퍼한 영랑은 산속의 축제를 몰랐을는지도 모른다. 모란이 져도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의 축제는 그치지 않고 있다. 바위 틈 작은 흙에 뿌리를 박고 피어나는 아주 작은 꽃의 자랑스러움. 이 꽃이 모란처럼 화려하지 못하다 하여 자살을 하거나 자기 자손을 퍼뜨리는 것을 포기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인간만이 꼴찌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아카시아가 온 산을 향기로 덮고 흰 구름 같은 원무를 추기 시작하면 산새는 노래하고 다람쥐며 청설모는 어깨를 으쓱거린다.


따가워진 햇살을 등어리로 받으며 산길로 접어든다. 생명을 환희할 줄도 모르고 자연의 은혜에 감격할 줄도 모르는 채 덤덤하고 때로는 조금 우울한 마음으로 산길을 오른다.
고산골에는 밤나무가 유난히 많다. 국화가 피기 시작하는 가을 축제가 시작되면서 밤알이 뚝뚝 떨어진다. 가시로 둘러싸인 안전한 포대 속에 간직된 알밤을 만져 보니 포대에 싸인 아이가 생각난다. 종족 보존의 열망, 자연은 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