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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소설]울 아빠 (3)/신덕재

 

<1620호에 이어>
울 아빠 없는 피난살이는 지옥생활과 같았다. 목포로 내려 왔다가 무안으로 배치가 됐다. 어려운 피난살이 중에도 울 생모는 내 동생을 출산했다. 내 동생은 죽어서 태어났다. 못 먹고 힘든 피난길에 동생도 어쩔 수 없었나보다. 죽어 태어난 동생이 가엽기 보다는 부러웠다. 난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팔다리는 대나무 같고 배는 맹꽁이 배 같았다. 울 아빠와 같이 있던 낭까리골 월남 때보다 더 흉했다.


무안에 배치 된지 6개월이 지났을 때 형수가 왔다. 장조카를 데리고 갔다. 울 아빠가 피난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다. 단지 장조카인 자기 아들 고생시켰다고 강짜만 부리다가 갔다. 이 광경을 울 아빠가 보았으면 어떠했을까? 서시어머니에게 대드는 며느리를 꾸짖었을까? 아니면 장손을 위해 며느리를 두둔했을까? 장조카가 배고프게 산 것도 다 원수 갚는다고 아들은 돌보지 않고 혼자 날 뛴 것 때문 아닌가? 제 새끼만 챙기니 괘심하기가 짝이 없다.
피난오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형수는 집안의 맏며느리라고 울 생모를 얼마나 업신여겼는지 모른다. 시어머니 대접은 고사하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맏며느리로 서시어머니를 우습게 보았다. 덩달아 나 또한 서자취급을 당했다.


형수의 개정이 괘씸하기는 했지만 어려운 피난생활에 장조카를 데려 간다니 고맙고 반가왔다. 한 입을 더는 것이 한결 나았기 때문이다. 한 입 더는 것 자체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강짜만 부리지 않고 장조카를 데려 갔다면 형수의 지난 허물을 다 씻을 수 있었겠구먼 그것을 못하니 참 안타깝다. 울 아빠가 없으니 형수가 집안의 어른 노릇을 하려고 했다. 울 생모가 불쌍하다.
울 아빠가 있어도 별 수 없었겠지만 울 생모는 살기 위해 남의 집 배도 짜고 허드레 일도 하고 먹고 사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다. 나는 줄기차게 배고프다고 졸라 됐다. 졸라 된다고 밥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무작정 졸라보는 것이다.


울 아빠가 없으니 모든 사람들이 우리 식구를 업신여겼다. 어느 날 면장인지 이장인지 하는 사람이 와서 울 생모에게 개가를 하라고 권했다. 울 생모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개가는 못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 날 울 생모는 밤새도록 울었다. 그 이후로 개가를 하라고 추군 데는 일이 없었다.
울 생모는 나를 고아원에 보냈다. 도저히 먹여 살릴 수가 없었다. 고아원에 가면 구호품으로 명은 부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1년 가까이 고아원에 있었다. 고아원에서 나올 때, 작은 아버지가 찾아 왔고, 전쟁이 끝나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이제는 영원히 울 아빠를 만날 수 없다. 이제는 남과 북이 휴전선으로 완전히 막히게 됐다.
작은 아버지는 아직도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다녔다. 붓 장사를 한단다. 그러니까 남한 천지의 글방이라 글방은 다 다닌다고 한다. 그렇게 다니다 보니 우리 성의 본인 합천에도 갔단다. 합천에는 우리 성씨가 많이 산다고 하면서 그 곳에 가면 식모살이일망정 배는 곯지 않는다고 합천에 가보라고 울 생모에게 권했다.


휴전이 되어 완전히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 앞으로 울 아빠를 만날 수는 없는 일이고, 어째든 살 아는 가야 하므로 울 생모는 합천으로 가기로 했다. 같은 종씨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합천에 와서는 배고파 울지 않았다.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고 합천에서 배고픔을 면하고 나니 돈이 필요했다. 나 또한 국민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다. 그래서 엄마는 식모살이로 밥을 벌고 누나 둘은 사탕공장에 나가 돈을 벌어 나를 학교에 보냈다.
합천에서 2년이 지났을 때에 작은 아버지가 다시 찾아왔다. 돈을 벌려면 인천 송도를 가면 좋다고 했다. 송도 앞 바다에서 조개를 캐면 먹고 살 수 도 있고 돈도 벌수 있다고 했다. 작은 아버지가 울 아빠 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국민학교 1학년을 마치고 송도로 왔다. 송도에 오니 아직도 전쟁의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 자유롭게 조개를 캐서 자신의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