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7 (금)

  •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문인의 향연/소설]울 아빠 (5)/신덕재


<1624호에 이어>
병원이 제법 잘 됐다. 나도 장가를 가게 됐다. 난 울 아빠처럼 여러 부인을 두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때도 아니다. 주위에선 명문대학교를 나온 의사이니 집안도 좋고 예쁜 여자를 맞아야 한다고 했으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처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집은 지지리 못 살고, 아빠도 없는 편모슬하고, 행상을 하는 생모에, 뼈대라고 말 할 것은 하나도 없고,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라고는 삐쩍 마른 몸매에 의사라는 타이틀 하나뿐이다. 그래서 평범한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등학교만 나온 여자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장인이 없는 셈이다. 아마 내 사주에는 아버지라는 명칭이 없는 모양이다. 울 아빠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장인마저 없게 됐다. 사주가 어떻든 팔자가 어떻든 아버지라는 말이 그립다.


이제는 울 생모가 행상을 하지 않아도 됐다. 아마도 울 생모의 생애 중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울 생모가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의 찌든 더깨를 씻고 싶은 모양이다. 교회에 가서 무엇을 간구하는지 모르겠다.


울 생모의 환갑이 지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울 생모가 울 아빠의 제사를 지내자고 한다. 돌아가신 날을 모르니 울 아빠의 생일날에 제사를 지내잔다. 교회에 나가면서 왜 울 아빠의 제사를 지내자는지 모르겠다. 울 생모도 나처럼 꿈에 울 아빠가 나타나서 돌아가신 것을 알려 주었을까? 그래서 그 이후 울 아빠의 제삿날은 울 아빠의 생일날이다.


나도 아들과 딸을 낳았다. 울 생모는 내 아내가 첫 아들을 낳았을 때 내 아내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정말로 기뻐했다. 손자가 좋은 모양이다. 울 아빠도 날 낳았을 때 좋아했을까? 난 이때 생각했다. 내가 태어 낳을 때 울 아빠가 날 좋아했는지는 모르나 지금 나는 울 아빠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자식이 먼 훗날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울 아빠를 생각하는 것처럼 내 자식도 나를 그렇게 생각할까 은근히 걱정이 된다.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이 되풀이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박사학위를 받았다. 울 생모가 좋아 어쩔 줄 몰라했다. 울 생모는 살아생전에 이처럼 좋은 때를 만나리라고 생각 못한 모양이다. 평생 고생만 하다가 죽을 줄 알았단다. 이제는 바랄 것이 없단다. 지난 고생이 눈 녹듯이 사라진단다.


울 생모에게 치매가 왔다. 자꾸만 울고 계신다. 울 아빠가 불쌍하단다. 그래서 눈물이 난단다. 당신은 지금 행복해 죽겠는데 울 아빠는 고생만 하고 있단다. 그러니 슬프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참 울 생모는 배알도 없는 모양이다. 울 아빠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고 모질게 살아 왔는데도 뭐가 그리도 울 아빠가 그립고 불쌍하단 말인가. 이게 부부간의 정인가? 에이 이 모진 정아!
울 생모는 울면서 돌아가셨다. 울면서 돌아가셨어도 울 아빠를 불쌍히 여기고 울 아빠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돌아가셨다. 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울 아빠는 참 염치도 없는 사람이다. 당신은 하고 싶은 데로 살아 왔는데도 당신의 아내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되돌려 주니 말이다. 울 아빠는 여복이 있는 걸까?


하긴 울 아빠가 울 생모의 용서와 사랑을 알 리가 없으니 아무리 울 생모가 울고 울면서 사랑과 용서를 주어도 소용이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울 아빠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도 장년이 됐다. 병원이 잘 돼 못사는 이웃을 생각할 정도가 됐다. 고생의 멍에가 얼마나 힘들고 배고픔의 대물림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아는 나는 다시는 이 세상에 이런 멍에와 비참함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작은 힘을 보태려고 했다.


IMF가 닥쳐와 길거리에는 노숙자가 넘쳐흘렀다. 먹고 살 집을 하루아침에 날려 버리고 거리로 나 앉은 사람들이다. 내가 피난 나올 때와 같다. 이들은 나의 옛 모습이고 나다. 이들을 돕고 싶다. 아니 이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돕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