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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수필/김영진]미륵산 챙바위(상)

내 고향 익산 땅은 언제나 엄마 품 같은 미륵산이 언제나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곳이다.
미륵산은 제일 높은 곳이 해발 340m밖에 되지 않았지만 넓디넓은 만경평야 북쪽 끝에 자리 잡고 있어서 정상에 올라서면 남녘으론 대장촌 너머 만경강이 은하처럼 감아나가고 좌우로 전주와 군산은 물론 멀리 부안읍내까지도 가물거리며 아기자기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해질녘이면 능금 빛 저녁노을 아래로 아스라한 서해바다가 마치 금가루를 흩날리는 신기루처럼 손에 잡힐 듯 다가오곤 했다.


하지만 산과 하늘이 만나는 굴곡진 등성이마다 천혜의 위치를 노리고 인간이 쌓아올린 갖가지 송신탑과 중계탑이 잔뜩 흉물스런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껏 미륵산이 화내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서는 사업 때문에 멀리 도시에 나가서 사셨고 우리 형제자매들과 할아버지, 할머니 등 나머지 가족들은 그렇게 미륵산이 지켜보던 시골에서 살았다. 인자하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언제나 웃는 얼굴로 손자들을 지극히 보살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다. 마치 산신령처럼 길고도 풍성한 허연 수염을 흩날리던 회초리맨 훈장 선생님을 우리들은 북성 양반이라고 불렀다.
그 훈장님의 고향이 북성이라서 붙여진 존칭이라고들 했지만 솔직히 나는 아직도 북성이 어디인지 모른다. 한 때는 북극성으로 오인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물정 모르던 소시 적 일이었을 뿐이다.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우리 형제들은 문간채 사랑방에서 올망졸망 검정이불 하나로 혹한을 버텨냈다. 하지만 군불 때는 땔감은 언제나 맏형인 나 혼자서 해결해야만 했다.
엄동설한에 소나무밭에 들어가서 청솔가지를 딸 때는 나뭇가지가 얼어서 살짝 낫을 대기만 해도 가지가 뚝뚝 떨어진다. 그렇게 쉽사리 나무 한 짐을 챙겨 와도 모두가 생솔가지라서 불을 붙일 때는 메케한 연기가 온 집안을 뒤덮었다.


눈물을 철철 흘리며 아무리 후후 불어대도 불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만 불이 댕겨지면 송진성분이 많아서 투두둑거리며 저절로 잘도 탄다.
 그 당시에는 거의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줄무늬 내복 한 벌에 노란 무궁화 양철단추의 검정 대마지 교복 한 벌이 유일한 방한복이었다.
여덟 살이 되던 해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는 집에서부터 자그마치 3km가 넘는 거리에 있었다. 고개를 넘고 시내를 건너 숲속 오솔길과 논두렁길을 따라 한 시간하고도 30분은 족히 더 걸렸다. 그러나 이것저것 해찰을 하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면 실제로는 한나절이나 잡아먹었고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늘 지각대장이었다.


겨울철에 그 먼 길을 걸어서 수업을 받으러 다니던 기억은 한마디로 악몽이었다.
혹한을 타고 파고드는 칼바람으로 귀는 얼어 터지고 손과 발은 겨울 내내 동상에 걸려 부어있었다. 눈만 내리면 스며드는 눈으로 검정고무신 속이 가득 찼다. 털고 또 털어내도 눈은 곧 녹아서 발을 적시고 젖은 발은 부풀어 올라 피부가 벗겨져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쓰리고 아팠다.
기나긴 겨울을 지내다가 혹 감기에라도 걸리면 할아버지께서는 한 식경이나 걸리는 동구 밖 석불리 너머 능그리목 무허가 한약방에서 탕약을 지어다 달여 주셨다.


 한번만 달여 먹으면 아까우니까 몇 번씩이나 삶아댔는데 두 번째 끓인 약물을 재탕, 세 번째 끓인 약물은 삼탕이라 불렀다. 하지만 삼탕 쯤 되면 한약재가 목욕을 하고 지나간 물이나 진배없었다.
 탕제는 언제나 알 수 없는 먹물글씨가 휘갈겨진 약봉지로 솜씨 좋게 포장되어 있었는데 할머니께서는 약을 쌌던 그 종이만 달여 먹어도 병을 일으킨 잡귀가 약명에 놀라 달아나기 때문에 병이 낫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