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나는 영화 감상하기라고 대답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영화 감상하기는 아니다. 영화 요약편 감상하기이다. 요새는 유튜브 콘텐츠가 워낙 잘 되어있어서 15분 정도면 3시간 분량의 영화 한 편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디테일을 살필 순 없지만 하루에 영화 1편 보기는 너무나 힘들기에 약간은 우회적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요약편만 보다가, 밤을 새우더라도 전체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지난주가 그랬다. ‘The greatest game ever played’ 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한국에서는 ‘내 생애 최고의 경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1913년 US오픈을 배경으로 아마추어 골퍼였던 ‘프란시스 위멧’이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한 내용을 담고 있다. 프란시스 위멧은 골프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지만 가난한 집안 환경 때문에 골프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결국 중간에 골프를 그만두고 다시 스포츠 용품점 점원으로 생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스포츠 용품점 사장님과 주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결국 1913년 매사추세츠 아마추어 골프 대회에서 우
요즘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상황과 사건으로 매일매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일들을 현실에서 겪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의료계는 코로나19라는 세계적 팬데믹 상황을 맞아 최전선에서 헌신과 봉사의 아이콘으로 국민의 칭송을 받기도 하였고, 최근에는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결정에 대한 반발과정에서 의사들은 국내 정치의 양단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치과는 이러한 격랑의 시간 속에서 희생과 봉사의 아이콘으로도, 국내 정치 상황의 중심에도 서지 못하는 제3자 주변인 같은 상황에 있는 듯 하다. 심지어 코로나 사태 초기 대구에 의료인의 사명감으로 본인의 희생을 각오하고 환자를 위한 자원봉사를 하러 갔던 여러 치과의사분들이 현장의료진에 의해 봉사를 거부당하여 치과계에 충격을 준 일도 있다. 이렇듯 치과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숭고한 의업을 수행하는 고귀한 직업임에도 늘 주변인처럼 이도 저도 아닌 경우가 많은 듯 하다. 실제 일반의사와 교육과 업무가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대중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의사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듯 하고, 치과의사는 숭고하게 생명을 좌지우지 하지도 않고, 치아만을 다루면서 비보험으로
얼마 전 핸드백을 습득했다가 주인을 찾아준 일이 있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다가, 내릴 정류장에 거의 도착하여 내리려는데 맞은 편 자리에 사람은 없고 하얀 핸드백만 하나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아까 어떤 여자 분이 앉아 있는 것을 얼핏 본 것 같은데 실수로 가방을 놓고 내리신 것 같았다. 내려야 할 순간인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저 핸드백을 그대로 놔두면 버스 회사 분실물 센터를 거쳐 주인에게로 잘 돌아갈까···. 버스 기사 아저씨나 경찰에게 맡기면 주인에게 잘 갈까···. 서로 믿지 못 하는 불신 사회, 대한민국의 구성원답게 여러 가지 의심을 하다가 결국 핸드백을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핸드백을 열어보니, 이런… 신분증도 명함도 주인에 대한 어떤 메모도 없다. 돈과 카드, 백화점 상품권, 시계, 로션, 사진 그리고 카드전표 한 장이 전부였다. 그냥 놔둘 것을 괜히 갖고 내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는데 카드전표에 적힌 상호가 눈에 들어왔다. W피부과의원···. 치과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 지가 즉시 머리에 떠올랐다. W피부과의원에 전화를 건다. 피부과 직원에게 카드결제가 이루어진 시간과 금액을 불러준다. 피부과 직원이 일일 장부를
가난한 이웃을 보고, “돈을 찍어서 나눠주면 될 것 아닌가?”하고 의아해하던 초딩 시절이 있었다. 사자 무리는 힘센 수컷이 지배한다. 사냥은 암사자들에게 떠맡기고 맛있는 부위는 먼저 차지하며 짝짓기도 독점한다. 눈에 거슬리면 폭력으로 다스린다. 한참 힘이 오른 젊은 수놈이 동료를 부추긴다. “옆에서 지켜보니 별 것도 아닌데, 내가 한 번 도전할 테니 좀 도와줘.” 대략은 실컷 얻어맞고 꼬리를 내린다. 쉽게 풀어본 ‘세대 갈등’이다. 대장은 새끼를 물어 죽이려는 외부의 적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며, 발권력(發券力)을 남발하면 화폐는 신뢰를 잃어 휴지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비로소 어른이 된다. 대장이 늙고 이가 빠지면 무리에서 쫓겨나고, 치열한 경쟁을 이겨낸 젊은 사자가 그 지위를 승계한다. 효(孝)라는 개념은 사회의 발전·경제적인 여유·수명 연장 등, 인간만이 성취한 ‘문화’와 분리할 수 없다. 성숙기간이 긴 인간이 낳고 키워준 1세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다. “자식은 내리사랑, 손자는 치사랑”이라고 한다. 부모에게는 맏이보다 뒤늦게 얻은 막내가 더 애잔한데, 3세를 보는 할아버지 눈에는 맏손자가 더 귀하고 든든하다는 얘기다. 먼저 아들의 경우다. 첫째
<The New York Times>에 오랫동안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 “The Ethicist”가 있습니다. 현재 뉴욕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윤리학자 콰매 앤터니 애피아가 맡은 이 칼럼은 독자가 보내는 윤리 관련 질문에 윤리학자가 답하는 방식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치의신보에서 매월 1회 의료윤리 주제로 같은 형식 코너를 운영해 치과계 현안에서부터 치과 의료인이 겪는 고민까지 다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약력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 동병원 소아치과 수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및 건강정책 교실 생명윤리 석사. 저서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2018), 역서 <의료인문학과 의학 교육>(2018) 등. 지난 8월 벌어진 의사 파업 또는 의정갈등 사태는 2000년 의약분업 사태 이후 한국 사회에 의료인이 가장 큰 물의를 빚은 사건인 것 같습니다. 의사가 파업해도 되는가? 라는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해 한국 의료 정책의 방향과 의료인 교육까지 문제를 제기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치과계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야 할까요? 익명 2020년 8월 있었던 의정갈등 사태
언제부터인가 치과 개원을 준비하면서 마케팅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이 필수가 되었다. 보통은 홈페이지를 어떻게 할까 정도를 고민하지만, 병원을 크게 하겠다고 하는 분들은 마케팅 팀을 따로 두기도 하고 외주회사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원래는 마케팅이란 것이 나쁜 게 아닐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개인적으로 의료계의 광고판은 가장 나쁜 사람들이 가장 착한 척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나쁜 치과가 임플란트의 합리적 가격을 말하고, 임플란트를 반값에 심어주겠다고 하고, 심한 치주염 환자를 하루 만에 사과를 씹을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또한 수술이 필요한 환자의 99%를 수술없이 교정할 수 있다고 광고한다. 광고판에 발을 담그지 않고 치과를 운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동네에서 오는 환자만 양심에 따라 정성을 다해 치료하고 그것만으로도 병원이 운영이 된다면 치과의사로서 반은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네이버 검색 광고만 해도 임플란트, 교정 등 치과의 대표적인 상품(?)들은 이미 시군 단위로 광고가 이루어지고 있다. “평택 임플란트”, “안성 교정”으로 검색하면 이미 많은 병원들이 광고를 하고 있다. 그 외에도
남편은 환갑이 넘어서 자기 딸들 보다 어린 여비서와 바람을 피다가 아내에게 이혼 당한다. 엄격한 가톨릭의 본고장 출신이기에 이혼은 그 동안 쌓아온 그의 명성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다. 남편은 알고 보니 꽤 바람둥이였다. 아내는 남들의 불편한 시선과 남편에 대한 배신감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전남편을 회상하며 그녀는 말한다. “시간이 많은 것을 덮어주더군요.” 그렇게 그를 용서하며 따뜻하게 감싸준다. 올해 초 개봉한 론 하워드 감독의 Pavarotti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의 음악, 인간미, 인생과 음악에 관련된 여러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나온다. 비평은 잠시 제쳐 두고, 인간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그는 정말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살다갔다. 본처에게도 나중에 용서 받았고, 딸들에게도 용서 받았고, 그의 많은 연인들 중의 몇몇도 그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었으니... 무엇보다 그는 사람을 좋아했고, 사람을 잘 믿었다. A 원장은 연고지가 아닌 곳에 개원하여 몇 년이 지나 자리도 어느 정도 잡히고 안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B 씨는 A 원장 치과의 근관치료환자였고, B 씨의 어머니는 임플란트, 딸은 교정환자였다. A 원장은 B 씨를
6년 전 어느 가을날,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캠핑카를 빌려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숙소도 있었기에 밤에는 아이 둘과 저만 캠핑카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새벽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깐 나왔을 때, 잠이 덜 깨서 환상을 본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형언할 수 없는 밝은 빛을 보았습니다. 제가 본 것이 은하수였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무서울 정도로 밝은 빛에 놀라 얼른 다시 들어가서 잠을 청했고, 다행히 쉽게 잠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부터 별 보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몽골 테를지 국립공원에서 보았던 별들도, 그 때 처음 본 별똥별도 기억에 남지만, 하늘이라는 화면을 꽉 채운 별을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겁이 좀 많은 편이라, 실제로 보면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우주라는 것을 생각만 해도 조금 두렵습니다. 너무 넓은 곳에 먼지같은 저의 존재가 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우연히 찾게 된 인터넷 사이트 중에 빛 공해가 얼마나 심한지 보여주는 곳이 있었습니다. 쏟아지는 별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갈 수 있는 지역 중에 빛 공해가 가장 적은 곳을 숙소로 삼아 1박 2일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사이트
한때 그날의 미세먼지 농도를 체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 적도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전일 발생한 코로나 확진자수를 궁금해 하는게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이다. 다소 진정되는 듯 보이던 코로나 상황은 8월 15일을 기점으로 염려했던 2차 피크 양상을 보였고 방역당국은 보다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며 진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첫 번째 유행 때보다는 코로나가 훨씬 우리 가까이 다가서온 느낌이다. 급기야 치협도 8월 24일과 9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직원이 확진판정을 받아 협회회관이 일시 폐쇄되고 방역조치를 하는 긴박한 상황이 있었다. 어쩌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의 시간이 연장된 배경에는 전문가 의견을 무시한 정치적, 경제적 판단도 일정부분 작용했다고 본다. 1918년 3월에 시작해 1919년 여름까지 스페인 독감 팬데믹 기간 동안에 총 3개의 질병파도가 있었고 1918년 가을의 두 번째 파도가 가장 강하고 치명적이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과 미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의 앤서니 파우치 박사가 한 목소리로 바이러스의 두 번째 파도를 경고했지만 경제회복이 더 급했던 정부는 임시공휴일까지 지정해가며 방역망을 느슨하게 풀어줬
대한치과의사협회 자재·표준위원회에서는 국제표준화기구 치과기술위원회(ISO/TC 106)에서 심의가 끝나 최근 발행된 치과 표준을 소개하는 기획연재를 2014년 2월부터 매달 게재하고 있습니다. 환자 진료와 치과산업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8월 20일부터 28일까지 국제표준화기구/치과전문위원회(ISO/TC 106) 국제회의가 온라인으로 개최되었다. ISO/TC 106 국제회의는 치과 산업과 관련된 국제표준 문서를 제정, 개정, 폐지하는 회의로 전 세계 28개국이 투표권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고, 16개국이 참관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는 대규모 국제회의다. 올해는 전례 없던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미국 샌디에이고(San Diego)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총회가 온라인을 통한 가상의 공간에서 개최되었다. 필자의 경우 올해로 세 번째 참석하는 총회인데, 이전 두 번의 총회 참석에 곡절이 많았던 기억이 있다. 참석을 위해 한국을 떠나기 직전까지 일정이 무척이나 꼬여서 항공권과 숙박 일정을 연거푸 조정해가며 겨우 참석하였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이번에는 전례 없는 온라인 총회라니! 온갖 세상 걱정을 다 떠안은 모양새로 밤늦게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
임플란트가 꽤 많은 저희 치과 환자의 파노라마입니다. 지금껏 한번도 결제를 하지 않으신 저의 치과 최고액 장기체납환자(전액 미결제) 입니다. 70년대와 80년대 산업화 시절의 주역. 치과도 없었고, 치과도 잘 안가던 시절이고, 자식들 열심히 키우시고 부모님 봉양하시던 직장인이셨고. 치열하게 자식들 키우시던 시절부터 막내아들 치대 보내고 아들 본과 실습 시작할 때까지, 오직 칫솔질이 치아를 위한 유일한 치료이자 투자이셨겠습니다. 막내아들(92학번) 치대 보내시고, 5년을 기다리시다가 본인의 은퇴(96년도)와 맞물려, 막내 아들 원내생 스케일링 실습부터 본격적인 치과 치료는 시작되었습니다. 치주과 스케일링 실습이후 치주과에서 잇몸치료와 하악 4전치 발치 하셨고, 보철과에서 하악 전치부 6전치 브릿지와 36번 크라운을 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환자삼아 보호자삼아, 진료 보조의 미명하에, 수련의 선생님들의 치료를 모두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아빠는 자식이 다니는 학교 수련의 선생님들께 치료 받으시면서도, 너무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말끔해진 치주치료와 보철치료로, 아빠는 그 시절 세상을 다시 사시는 듯 행복해 하셨고, 치료해 주시던 선생님들을 지금까지 입이 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