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시선 양영태 칼럼 이집트 독재 항거 ‘무바라크’ 세습음모가 주원인 이집트에서 벌어졌던 반(反)정부 시위는 일반적으로 이집트 국민의 자유를 억압한 무바라크의 실정으로 인한 경제파탄이 그 원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것보다 더 큰 시위촉발의 원인은 무바라크가 그의 아들을 세습시키려는 시도 때문에 벌어진 반독재 반세습 투쟁이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은 결국 아들에게 이집트 권력을 상속시키려다가 오늘의 처참한 말로를 자초한 셈이다. 30년의 긴긴 세월도 부족해 아들한테까지 권력을 세습시키려했던 무바라크의 운명은 곧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보여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3대독재세습을 본 따려다가 이집트 국민들의 무서운 항거에 직면하게 된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가장 우월하고 모순이 없는 정치체제라는 것이 세계사적으로 검증되고 입증되었지만 아직도 일부 아프리카, 아랍, 북한이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세계사적인 불행이다. 결국, 이집트가 원만하게 자유민주화의 길을 걷게 된다면 독재를 펼치고 있는 일부 아랍, 아프리카 국가들과 더욱이 북한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주민들의 ‘저항도미노’에 직면하
명사시선 임철중 칼럼 <전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 애매에서 모호까지 점잖은 노신사가 택시를 탄다. “기사양반, ‘전설의 고향"으로 갑시다." 나이가 지긋한 기사는 잠시 멈칫 하더니 이내 빙긋이 웃으며 미터기를 누른다. 삼십분 뒤 손님이 내린 곳은 서초동 ‘예술의 전당" 앞이었다. 넌지시 운(韻)만 떼어도 대충 눈치로 때려잡는데, 귀신을 뺨치게 알아맞히는 솜씨, 이것도 한국인만의 남다른 재주다. 그래서 삼행시가 태어나고 유행한다. 그러나 이처럼 머리가 너무 잘 돌아가는 재주는 그 폐해 또한 만만하지가 않아서, 지레짐작과 넘겨짚기로 인한 실수나 오해 즉 ‘소통의 부재"라는 후유증을 남기는 일이 다반사다. 필자를 포함하여 누구나 흔히 범하는 실수이기에 저자의 양해를 구하며, 치의신보에 실렸던 릴레이 수필 한 대목을 인용한다. “엄마들은 고까와 할 수가 없었는데"라는 문장을 보자. 정확하게는, “그렇게 고까와 할 수가 없었는데" 하거나 “할 수밖에 없었는데" 로 써야한다. “고깝다"는 말은 “야속한 느낌이 있다"는 뜻으로, ‘밖에" 나 ‘그렇게"가 들어가야 비로소 이중부정의 강조가 완성된다. ‘밖에"는 ‘오로지" 고까울
신 재 의 <대한치과의사협회 협회사편찬위원장> 역사는 소설이 아니다 역사는 소설이 아니다. 역사는 허구가 아닌 역사적인 사실인 지역, 인물, 시대의 조건을 충족하게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함석태(咸錫泰)는 조선치과의사회나 경성치과의사회에 가입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것만으로 이 회에 가입했다는 것은 함석태 개인을 저평가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제 함석태는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사회에 책임을 다하고, 나라를 사랑한 면모를 보아 그가 조선치과의사회나 경성치과의사회에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1. 함석태는 그의 회고록에서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그 당당함을 보여주어 사회에 인식을 환기시키려 하였다. 또한 후진의 앞길을 열어주는 데에도 책임을 감당하려 하였다.1) 2. 함석태는 나라와 동포를 사랑한 면도 있었다. 함석태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사이토 미노루(齊藤實) 총독을 저격했던 우국지사 강우규(姜宇奎)의 어린 손녀강영재(姜英才)를 일제강점기에 양녀로 키웠다는 사실은 함석태의 나라와 동포를 사랑한 면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실이 된다.2) 3. 함석태의 경우에는 문화재
명사시선 임철중 칼럼 <전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 빨강 라이방 무역량이 세계 10위 내에 들고 GDP도 높아 잘 살게 됐다는데, 어인 일로 삶은 더 팍팍해지고, 치열한 경쟁 속에 낙오자가 늘어난다. 파산선고 후 버티고 버티다가 홈리스로 몰려 일 년쯤 지나면, 멘탈이 비가역적으로 황폐해진다고 한다. 이들이 서울역 대합실 벤치에 앉아있으면, 열차 이용객들은 슬금슬금 피해간다. 불결과 냄새보다는 막연한 불편감이 더 크리라. 택시 승강장에서 대놓고 금품을 요구하는 강심장도 있다. 그래도 개중에는 자신만 아는 행복한 세계로 도피한 소수가 있다. 비교적 깨끗한 옷차림에 미소를 잃지 않고, 마주치는 사람에게 알아듣지 못할 방언도 한다. 정신과 의사가 어떤 진단을 내리던 간에 필자는 이들을 ‘예도네’(예쁘게 돈[미친] 예언자)라고 이름 지었다. 며칠 전 지하도 입구에서 마주친 40대의 ‘예도네"가 생글생글 웃으며 한마디 날린다. “선생님, 무엇이 부끄러워 색안경을 쓰셨나요?” 죽비로 얻어맞은 듯 한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방금 내가 화두(話頭) 하나를 받은 것은 아닐까." 백척간두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낸 인천상륙작
|명|사|시|선|임철중 칼럼 <전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 의사와 휴머니티 “4년제 대학 졸업 후 의·치대에 입학하는 전문대학원제도도 사실은 인문학 강화가 요체다." 본란(欄)의 첫 번째 칼럼 ‘전환기의 진통"(10.09.13) 중 한 대목이다. ‘전문인 AS는 셀프"(10.11.08)에서는, 의사의 의무를 보편성(표준성)과 향상성 및 인간성(humanity)의 셋으로 나누어 살피되, ‘인간성"의 논의는 뒤로 미룬 바 있다. “사람은 왜 사는가?" 라는 의문에 해답을 찾는 ‘인간성의 도야(陶冶)"가 곧 인문학이라면, 이에 접근하는 길의 하나로서 전문대학원 제도에 대다수가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한국 고등학교는 의무교육 과정이다. 온갖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고교평준화의 틀을 고수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반증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교생이 규격화된 프로그램에 묶여 대학입시 대비훈련만 강요당하고, 급우들 사이에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익힐 여유와 공간은 대학으로 떠넘기고 있는 바, 전문직대학 진학생들은 결국 이런 시간마저 박탈당한다. 전문대학원 제도에는 문리대(liberal arts & sciences)에 준하는 개념
추도사고(故) 이춘근 선생님 10週忌 선생님의 ‘큰 사랑’아직도 생생 그리운 선생님, 보고싶은 우리 선생님 저희들과의 이 세상 인연(因綠)을 접으시고, 영원한 천상(天上)의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지도 어언(於焉) 10년이 되었습니다. 유수(流水)같은 세월이라 했던가요, 꼭 10년 전 선생님 댁 안방 베란다에서 그것이 마즈막인줄도 모르고 몹시 어려워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물끄러미 뵈온 것이 벌써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며칠 후에 위중(危重)하시단 전갈을 받고, 병원중환자실에 찾아간 저는, 운명(殞命)하시기 바로 몇 시간 전이였지요. “선생님, 선생님, 종원입니다”하고 부르짖는 제 목소리를 알아들으셨는지 무겁게 감으셨던 눈꺼풀을 파르르 떨으셨던 모습이 10년의 세월을 거슬러, 마치 엊그제 일이었듯 저희 기억속에 선명(鮮明)하고 생생하게 남습니다. 선생님, 참으로 다시 뵙고 싶은 선생님! 저희들에게 베풀어주셨던 선생님의 그 사랑과 그 가르치심이 참으로 컸었기에 적잖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희들 마음과 마음속에서 이렇게 큰 그리움으로 남아, 오랜 세월동안 기억되나 봅니다. 소한이 지난 지금 서울은 몹시 춥습니다. 멀지않아 따뜻한 봄이
임철중 칼럼 <전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 마지막 불장난 대통령 특사 때마다 영세 상인이(동네의원 포함) 시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머리 박박 깎고 팔뚝에 문신한 사내들이 험악한 얼굴로 가게(대기실)에 들어선다. 금품갈취는 범죄임을 아니까 먼저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별이 몇 갠지 알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 손님(환자)이 다 달아난다. 다급한 주인(원장)이 알아서 금일봉을 쥐어주면 가게는 비로소 ‘평화"를 찾는다. 쉽게 줄수록 소문이 나서 방문은 잦고 액수는 올라간다. 북한 김씨 일가는 대대로 국민 먹여 살리기에는 무능하고 오로지 칼 가는 재주만 익혔다. 칼만 팔아서는 벌이도 시원찮은데, 국제사회가 평화를 위협하는 칼 거래를 단속하니, 국민이 굶기를 밥 먹듯 한다. 어느 날 남한정권이 바뀌더니 으름장을 놓기도 전에 돈 보따리를 싸들고 와서 “그저 한번 만나만 주세요”애걸한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화수분이다. 본시 퍼주기만 하는 것은 거지에게도 못할 짓이다. 자립의지를 꺾어 돈 떨어지면 앉아서 굶고, 공돈은 헤퍼서 갈수록 씀씀이만 늘어난다. 동냥을 계속 올려 받는 비법이 있다. 가끔 한 번씩 행패를
|명|사|시|선|양영태 칼럼 <자유언론인협회장·전 치협 공보이사> 나를 일깨워준 책 한권 몇 달전 나에게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책(冊)과 그래서 아들 딸 들에게 읽히고 싶은 책(冊)을 한권 선정해달라는 월간조선의 유쾌한 청탁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대한 서평과 감상을 적어 보낸적이 있다. 그동안 월간조선에 글을 써왔던 필자들을 대상으로 95권의 책을 압축 해놓은 단행본이 선보인 내용에는 그야말로 실용적이고 읽기에 매우 편안하고 유익한 작품의 내용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있어 매우 행복한 독서의 시간을 또 한번 가질수가 있었다. 헤밍웨이 작품인 ‘노인과 바다’를 읽어 보라는 어렸을 적 중학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밤새 책을 읽으며 안타까운 몽상에 사로잡힌 적이 새삼스럽게 기억이 났으니….‘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자연을 향한 끝없는 도전과 의지를 표출한 인간이 지닌 저력의 극한을 나타낸 위대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노벨상 수상 작품인‘노인과 바다’는 그야말로 실존철학이 작품 속에 녹아있는 도덕적 개인주의의 임계점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노인과 바다’는 쿠바의 한 노인어부가 자기가 타고 있던
신 재 의 <대한치과의사협회 협회사편찬위원장> 조선치과의사회에 한국인 치과의사의 참여 여부와 정체성 지난 9일 치협 협회사편찬위원회(위원장 신재의)와 대한치과의사학회(회장 배광식)가 합동회의를 열어 치협 창립기념일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관련기사 2010년 12월 23일자 26면 참조>. 특히 이날 합동회의에서는 지난 1921년 설립된 조선치과의사회에 한국인 치과의사가 참여했는지 여부와 함께 회의 정체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같은 논의와 관련 신재의 치협 협회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변영남 대한치과의사학회 명예회장이 각자의 주장을 담은 기고문을 본지에 보내와 게재한다. 조선치과의사회(朝鮮齒科醫師會)에 한국인 치과의사 참석 여부는 조선치과의사회가 한국인 치과의사회가 될 수 있느냐라는 문제로 뜨거운 감자 중의 하나이다.어려운 일이다. 선학(先學)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선학의 글이 사회적 파장이 크고 잘못된 방향으로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때는 반론을 제기하여 보다 개선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후학(後學)은 이 일을 아니 할 수 없다. 기창덕(奇昌德) 선생님은 좋은
변영남 <대한치과의사학회 명예회장> 한국인 치과의사의 조선치과의사회 참여 개연성과 그 역사적 의미 역사의 아픔은 있지만 조선치과의사회는 한반도에 최초로 생긴 치과의사회임이 확실하다. 일본 치과의사들이 주축이 되긴 했지만 한국인 치과의사도 참여했으리라는 기록과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이에 근거해 창립기념일을 그대로 두어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첫째 ‘조선치과의사회에 한국인이 배제되었고 참여자는 한명도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창립 당시 조선치과의사회는 법정단체도 아니고 단순히 친목단체였으며 회원 가입도 임의대로였다. 그 전신이 경성치과의사회이고 경성치과의사회가 중심이 돼 전국 단위의 필요성이 있어 창립된 임의 단체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경성치과의사회에 한국인 치과의사 함석태(咸錫泰)도 이 회에 가입하여 동참한 것으로 되어있고 당시 일본인 치과의사는 대량 내도(來到)하고 한국인 치과의사는 불과 수명에 지나지 않지만 1925년 한성치과의사회가 창립 될 때까지는 한국인 치과의사들도 이 회에 입회하여 동참했다고 알고 있다”(기창덕 「증보한국치과의학사」 1995 366쪽)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주석
콩고민주공화국을 다녀와서 의료오지 봉사 젊은 치의 도전 절실 중앙아프리카에 위치한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은 1960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해 공용어는 프랑스어를 쓰고 있다. 한반도 11배에 달하는 넓은 국토, 6천8백만 인구, 다양한 광물자원과 풍부한 수자원이 있으면서도 1인당 국민소득이 200불이 안되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다. 전 인구의 75%인 5천여만명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DR콩고의 보건의료현황도 빈약하기 그지없다. 10여년간의 내전으로 인해 보건의료 인프라가 거의 붕괴된 상태이며, 의료시설 이용비용도 소득수준에 비해 매우 높아 빈곤층은 보건의료 서비스의 혜택에서 소외돼 있다. 11월 21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만 하루만에 수도 킨샤샤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15대의 이동진료차량(12대의 응급차와 치과, 내과, 산부인과진료차량)이 이미 가 있는 응가리마 국립병원으로 향했다. 이 병원은 DR콩고에서도 제일 좋은 병원으로 진료비도 너무 비싸 특정층만이 이용가능했다. 치과도 있었지만 담당치과의사가 미국으로 연수중이어서(이 여자치과의사는 한국에서도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의 도움으로 단기 연수한 경험이 있음) 진료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시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