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오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2016년 어느 날, 검진을 위해 집 근처 치과를 처음 방문했다가 방문 당일 한꺼번에 여러 치아의 보철 인상을 뜨고 진료비 기백만 원을 전액 지불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친구는 평소에 타 치과에서 정기 검진을 꾸준히 받았던 터였기에 집에 돌아가서 생각하니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 다음날 해당 치과를 다시 방문하여 본인의 초진 상태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영업방해로 경찰에 신고 되는 봉변을 당하였고, 결국은 진료비를 포기한 채 원래의 주치의에게 가서 삭제된 치아에 대한 보철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사실 친구가 처음 찾았던 치과의 원장(K 원장이라 하겠다)은 5년의 기간 중 차례로 두 곳의 치과에 개원하고 있는 동안 환자들의 불편 사례가 쌓였으며 ‘작년 8월 과잉진료로 피해를 입었다는 고소장이 접수돼 경찰이 수사에 나선 결과 피해를 입은 환자가 450명에 달하고’, 현재 ‘치과 과잉진료 의혹으로 소송 중’이면서 ‘치협 윤리위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1월 3일자 치의신보) 사람과 동일 인물이었다. 필자의 친구는 K 원장에게 직접 피해를 받았던 당시에는 그 원인을 본인의 불운 탓으로 돌렸지만, 주변의
우리는 누구나 말을 하며 산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아픈 가슴을 달래기도 한다. 물론 가벼운 수다를 떨며 정겨운 시간을 보내는 데에도 말은 톡톡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상념에 빠지면 우리가 듣고, 말하고, 소통하는 모든 행위가 조물주의 큰 선물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그만큼 말이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다. 오래 전 치과를 찾아온 농아 환자가 생각난다. 당시 그는 수화 통역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치과를 찾아왔다. 내게 손동작으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신기하기도, 생소하기도,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움을 주시던 봉사자가 사라졌다. 진료를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칠판을 들고 글을 써 가며 의견을 나눠봤지만 여전히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급기야 서점에서 수화 교본 몇 권을 사서 스태프들과 연습도 해보았지만, 영어도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회화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듯 수화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해서 의사로서 환자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뒤 오랜 시간 여러 가지 방편을 구상
어렸을 때부터 소록도에서 살다시피 하여 그곳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던 저에게 소록도 병원에서의 자원봉사는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봉사했던 ‘사랑 병동’은 한센병과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이 계신 병동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한센병과 정신 질환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던 데다가 환자분들도 낯선 저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경계하시는 탓에 도움을 드리는 것이 수월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다해 턱받이를 매드리고, 양치질, 세면 등을 도와드리면서 그분들의 하루 중에 많은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점차 서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진심으로 교감하게 되었습니다. 봉사를 하면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환자분들을 알아갈수록 그분들께 막연한 선입견을 가졌던 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고, 섣부른 선입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봉사를 하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은 ‘같이’의 중요성이었습니다. 환자분들 중에는 매일 같은 일이 일어나는 하루지만, 연명하시는 것에 의미를 두고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고 계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매일
내 인생에서 꽃을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특별한 날이었다. 보통 학업의 끝맺음에 대한 축하로 꽃을 받으나 예비치과의사 선서식은 새로운 학업의 시작을 축하하며 곱게 다려진 화이트코트를 교수님들께서 우리에게 직접 입혀주시면서 우리는 예비치과의사로서의 마음을 다잡는다. 새로이 받은 코트와 함께 의료인의 반열에 한 발짝 다가섰다는 설렘에 동기들과 사진으로 오늘날의 기억을 담았다. 의학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포즈를 잡았으나 다들 어색한 미소와 함께 부여받은 책임감에 눈빛이 긴장감으로 가득차 보였다. 치과대학 입학허가서를 받게 된 날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대학 합격이라는 기쁨도 컸지만 이보다 치과의사가 될 기회가 나에게 생겼다는 생각에 세상을 날아갈 것 같은 행복감을 느꼈었다. 나름 이 기회를 얻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하였고 남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치과대학에 입학하게 되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치과대학 예과, 본과 2년을 지내다 보면 나에게 주어진 이 특권에 대한 행복감을 잊을 때가 많다. 수없이 많은 밤샘과 시험으로 지치고, 콧속에 가득한 레진 가루에 한번 놀라며, 총의치 실습으로 교합 조정 시 갈매기 모양을 내기 위해서 새우깡을 들고 오는 자신
출발 오전 9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5시부터 일어나서 부산스럽게 준비했다. 이번 여행은 PFA 일본부회 50주년 기념 학술행사와 총회를 축하하기 위해 PFA 한국회를 대표해서 참석하는 자리였고, 나는 통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2박 3일 일정에 나름 간추린 가방을 메고 새벽 공항버스를 탔다. 잠을 설쳤지만 공중보건의사 신분으로 처음 가게 된 외국이고, 7년 동안 유학 생활을 했던 일본이라 감회가 새로웠고, 기대감에 부풀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총회에 참석하실 PFA 한국회 박일해 회장님, 김종원 교수님을 비롯해 회원 선생님들과 사모님들이 계셨다. 봄에 통영에서 열린 PFA 한국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지라 여러 선생님들이 반갑게 맞아주셨고, 부담 없이 인사드릴 수 있었다. 비행기를 타니 피로했지만 일정 확인과 통역 준비를 하느라 잠이 오지 않았다. 첫째 날 비행기 착륙 소리와 함께 실감이 났다. 서울과 달리 도쿄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나의 첫 임무는 공항에서 우리가 묵을 도쿄 프린스 호텔까지 안내를 하는 것이었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모시고 가야 해서인지, 중압감은 배가 되었다. 사전에 준비해둔 지하철 시간표와 지도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안
2012년 서울대학교 치과병원 구강내과 펠로우와 2014년 국립중앙의료원 치과 펠로우를 마치고 5년간 개원가에서 일반 진료 봉직의로 있었다. 그 후 2019년 7월부터 서울대학교 병원(본원) 치과에서 입원환자들을 대상으로 치과 진료를 하게 되었다. 6개월이 지나고 새해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동안 느낀 부분에 대해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구강이 불편하면 식사가 어렵고 식사가 어려우면 환자의 영양상태가 불량해져 질병의 치료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당장 구강으로 식사가 어려운 경우 완전비경구영양(total parenteral nutrition)으로 일시적인 영양공급을 할 수는 있으나 구강 식사를 완전 대체하기 어렵고 감염의 위험도 있다. 따라서 의과병원 내 치과의사는 적극적으로 환자의 구강 불편감을 일시적으로라도 해결해 주어 입원기간 중 질병의 치료를 돕고 퇴원 후 적절한 치과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안내를 해야 한다. 내가 보는 환자분들 중에는 항암 및 장기 이식으로 면역이 떨어져 당장 침습적인 치과치료를 받을 수 없고 이동도 제한되는 분들이 많다. 그러한 분들을 왕진으로 보면 구강캔디다증이나 구강헤르페스 감염으로 약물 조절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기존 치주염이
여행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지만, 여행의 순간이 즐겁고 가볍기만 한 건 아니기에,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예전에 다녀온 미국이 너무 좋았음에도 시간과 스팟과 동선을 생각하면 막상 쉽게 다시 가지 못한 채 10년이 지나왔듯이… 그러던 중 <Yellow Stone> 국립공원을 알게 된 건 우연한 기회였다. 스쳐 지나던 인터넷 블로그에서 노랗고 빨간 테두리를 가진 사파이어 빛 온천을 보았을 때 저긴 어딜까 했던 기억은 꽤 오랜 시간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가본 사람은 커녕, 루트조차 단순하지 않아 한 켠에 접어두기를 2년. 하지만 가보지 않은 길은 마음속의 기갈증이 되어 목이 마르니, 어떻게든 가는 방법을 찾아내고, 동행을 구하고, 차를 빌려 주섬주섬 떠나게 되어 시작된 여행. 역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시작은 어려웠으되 시작된 것은 전광석화와 같은 법이었다. 직항은 당연히 없고 그나마 가까운 보즈먼 공항으로 가려면 시애틀을 경유해야 했다. 이 와중에 동행으로 만나기로 한 샌프란시스코의 친구는 게이트 앞에서 비행기를 놓쳐 비싼 하루를 지내고 이튿날 만나게 되었으니, 보즈먼에서도 또 차로 2시간을 이동해야하는 <
‘만수르의 나라’로 많이 알려진 아랍에미레이트는 7개의 토후국이 연합하여 만든 연합 국가이다. ‘아랍권’의 나라라는 인식 때문일까, 나에게 아랍에미레이트는 낯설고 약간은 두려운 나라였다. 그러던 중 2018년 CONS ASIA 학회가 아랍에미레이트 샤르자(Sharjah)에서 개최되어 작년 12월 아랍에미레이트를 다녀오게 되었다. 두바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든 생각은 화려하다는 것이었다. 공항 규모가 어마어마할 뿐 아니라 공항 내부 인테리어도 ‘만수르의 나라’ 답게 부유함이 느껴졌다. 또 뉴스에서나 봤던 전통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에 내가 정말 두바이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CONS ASIA가 개최된 샤르자(Sharjah)는 아랍에미레이트에서 아부다비, 두바이 다음으로 제일 큰 토후국으로 문화적 도시라고 불린다. 우리가 참여한 CONS ASIA는 샤르자 교육단지 내에 위치한 University of Sharjah에서 개최되었다. 아랍에미레이트에서 개최된 만큼 아랍권에서 보존학을 전공한 많은 분들이 참석했고,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연자분들의 강의로 채워져 유익한 시간이었다. 학회장에서 보낸 첫 2일 동안 샤르자 치과대학의 학생, 교수님들과 이야기를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했던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도 했던가? 살아가면서 흔히 들었던 문구였던 것 같다. 그러고 나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선택으로 왜 이렇게 살아가는가?’라고 물어보게 된다. 나 역시 나이 40을 눈앞에 둔 지금 인생을 돌아보면, 수많은 선택을 해왔고, 그때마다 부모님, 선배님들을 포함해 친한 지인들과 같이 고민 상담도 해왔었다. 비교적 모범생으로 큰 말썽 없이 평범하게 자라왔으며, 청소년 드라마 ‘나’를 보며 재미있는 학교생활이 이루어질 것 같은 남녀공학을 선택 지원했다. 고1 때 식중독이라고 생각하고 방치했다가 응급실로 실려가 맹장이 터지기 일보 직전에 수술을 했었는데, 그때 만난 외과의사 선생님의 따뜻한 진료로 천사 같은 의사가 되어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 여느 하이틴 수기의 주인공처럼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을 3년 내내 무척이나 좋아해서, 하얀 가운을 입고 일하는 과학자, 연구원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대학 진로를 선택했다. 그렇게 꿈을 품고 대학생활을 하던 중,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관련 사건으로 온 국민이 들썩일 때 연구원의 길을 만류하는 주변인들이 생겨났었고, 그래도 주관과 목표를 가지고 연구
9년 전에 우연히 필리핀 의료봉사팀에 합류하게 되면서 대한여자치과의사회(이하 대여치)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 20대의 새내기 치과의사였던 나는 국내외 이동 진료소에서 소소하게 의료 봉사를 했던 약간의 경험을 가지고 겁 없이 따라나섰는데, 많은 선배 여성 치과의사들이 명절 연휴에 가정을 뒤로 한 채(무려 설 연휴 기간이었다.) 진료 봉사에 열정을 표하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때 받았던 깊은 인상을 글로 표현하여 대여치 이사회 때 객원 멤버(?)로서 발표도 하고 치의신보와 대여치 소식지에 글을 실기도 하면서 대여치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의료 봉사를 통해 인연을 맺은 만큼, 나에게 있어 대여치는 항상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일을 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해외 의료 봉사에도 매년 따라나서곤 했는데, 3년 전에 개원하게 되면서 한동안 참석하지 못하다가 이번 2019년도 캄보디아 파일린 해외 봉사에 다시 함께하게 되었다. 시간적, 심적인 여유가 그다지 없는 상황인 만큼, ‘어영부영하지 말고 의미 있는 일을 하나라도 더 하고 오자.’는 다짐 덕분이었을까, 특별히 ‘힘들다, 피곤하다’는 느낌도 거의 받지 못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은행나무다. 내 나이가 1억 8000만 년이나 된다. 그러니까 모든 나무의 형님이 되는 꼴이다. 나는 살아 있는 화석이다. 중생대 쥐라기 때부터 살았으니 말이다. 나는 홀로는 못산다. 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향교 뒤뜰이나, 사찰 앞마당이나, 도심의 가로수나, 동구밖 정자 옆에 거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난 부부로 함께 산다. 암나무와 수나무로 부부이다. 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한다.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과 상쾌함을 주고 집안의 빈대도 없애준다. 또 심장이 나쁘거나 피가 잘 안 도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징코민이라는 약으로 사람의 생명을 구해 주기도 한다. 나의 열매인 은행은 굶주린 백성들을 긍휼하는 구황작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뭇 선남선녀들의 낭만과 데이트 장소가 되기도 한다. 덕수궁 돌담길, 삼청동길, 정동길, 신사동 가로수길, 영주 부석사, 홍천 은행나무 숲, 아산 곡교천 은행나무길, 전주 향교 은행나무,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등 명소가 전국 곳곳에 있어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과 몸의 치유를 주고 있다. 이렇게 난 나의 낙엽까지도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