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하지만 군의관을 마치고 처음 치과의원을 개업했던 1986년까지 해외여행이라곤 꿈도 못 꾸었다. 개업 이듬해에 가까웠던 친구부부와 태국 파타야를 다녀온 것이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물론 그 전에 고등학교 수학여행지와 신혼여행지로 일종의 해외(?)인 제주도에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고등학생 때의 제주도 수학여행은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44년 전 어느 가을날이었다. 목포에서 제주를 왕래하던 여객선 ‘가야호’가 제주에서 목포로 돌아오던 중에 기관고장으로 동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마도 추자도 근해였던 것 같다. 600명이나 되는 우리 일행을 싣고 배는 정처 없이 섬 사이를 헤집으며 떠 다녔다. 몇 시간을 파도에 흔들리며 떠돌자 모두가 심한 뱃멀미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날이 어두워진 후 출동한 해군함정에 의해 다시 제주항으로 예인된 다음날 새벽녘까지 온통 공포와 고통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아마도 ‘세월호’사건의 전주곡은 아니었나 싶다. 1987년의 첫 태국 해외여행 이후 지금까지 30년 넘게 남아메리카를 제외하고 세계 곳곳을 두루 다녀왔다. 특히 ‘대한영상치의학회’를 따라 인도와 남아프리카 일대를 여행한 것이
지난주 저녁식사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마감 기한과 함께 예상치 못한 원고 작성을 부탁받고 어떤 글을 써야할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공보의 생활에 대해 편하게 수필을 작성하면 된다는 주문이었지만, 맡고 있는 직책상 오히려 공보의 생활에 대해 적어나가다가 너무 진지해질 가능성만 높아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편하게 써내려갈 주제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던 중 주변에 굴러다니는 공들이 눈에 들어왔다. 30여년 전 이족보행을 시작한 이래로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하던 여러 종류의 공들. 이거라면 마음 편히 글을 쭉 써내려갈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재미를 붙인 종목은 야구였다. 야구를 하기에 다소 어린 나이였지만, 동네 놀이터에서 직접 파울라인과 베이스를 그려가며 하루도 빠짐없이 친구들과 야구를 했다. 그 시절 일기장을 보면 매일같이 그날의 스코어와 기록을 분석해 놓은 것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꽤나 열정적으로 즐겼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 덕분인지 학부 때 야구 동아리에 용병으로 초청되어 나쁘지 않은 타율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조기교육의 중요성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농구와 축구로 종목이 변경되었다. 몸이 성장하
요즘 나의 최대 천적은 4살배기, 1살배기 두 조카다. 이미 가족 내 서열을 나름대로 정한 두 녀석에게 있어, 이모란 언제든지 “놀자”고 하면 반드시 놀이에 참여해야 하는 ‘부하’같은 존재이고, 자기는 맛이 없어 먹지 않는 반찬도 나이와 건강을 생각해 반드시 먹게 해야 하는 ‘막내 동생’같은 존재이며(요즘 4살 조카에게 제일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이모, 꼭꼭 씹어서 다 먹어”이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뚝딱 앞에 대령해야 하는 ‘백화점’같은 존재이다. 결론적으로 서열 꼴찌라는 얘기다. 최고의 VIP, 상전 중의 상전인 조카님들은 내가 본 사람들 중에 제일 이기적인 존재들이다. 자고 싶을 때는 주변 상황이 어떠하건 반드시 자야 하고, 먹고 싶을 때는 반드시 먹어야 하며, 식탁 위건 침대 위건 오르고 싶은 곳은 반드시 올라야 한다. 또 그것이 뜨겁건 차갑건 만지고 싶은 것은 반드시 만져야 한다. 자고 싶을 때는 불을 꺼라, 조용히 하라며 꼼짝 못하게 하다가, 주말에 늦잠이라도 자려 하면 몇 시가 되었건 “놀아야 하니 일어나”라며 잡아끄니 미칠 노릇이다. 어쩜 저만 생각하고 그렇게 이기적인지, 얄미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 그
지난 5월 3일부터 5월 6일까지 안중근 의사의 자취를 찾아서 중국 여행을 하게 되었다. 대학원 지도교수님 이셨던 김영수 교수님과 그 문하생 5명은 안중근 아카데미 수강생들의 현장답사 일정에 합류하였다. ‘안중근 아카데미’는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과 평화사상을 주제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약 15주간의 강의와 국외 안중근 의사 사적지 답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답사여행에 우리가 합류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역 대합실 안에 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특별열차가 오기를 기다렸고, 열차가 도착하여 오전 9시 30분경 이토 히로부미가 안의사 앞을 2, 3보 지나갔을 때쯤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쪽 몸통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 그중 3발을 명중시켜 사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라고 외쳤던 것이다.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항일투쟁사에서 최초로 발생한 중대한 사건이며 이후에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정상 이유로 하얼빈에서 안의사 거사 이후 행적 순서대로의 답사가 아니라 역방향 순서대로 여순에서부터 답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젊으셨던 40대 중반에 선친께서는 틀니를 끼기 시작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서랍 속에서 뒹구는 헌 틀니는 낯설지 않았다. 비록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지만, 신기한 장난감이었다. 때로는 뜨거운 찌개를 후루룩 드시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틀니 끼신 아버지가 부럽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치과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고, 가끔 틀니를 꺼내 들고 주머니칼로 내면을 조정하시거나 먹지를 입에 물고 교합조정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주 본 나로서는 의치를 전공하게 된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레지던트 1년 차, 처음 배정받은 틀니 환자는 나에겐 굴욕이었다. 본 뜨는 인상채득 과정이 과연 잘 된 것인지 알 수 없고 그 결과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던 당시로는, 스텝마다 선배님의 지도를 받아가며 치료를 진행했다. 다행히 결과는 만족스러웠지만, 환자는 수납 창구에서 ‘나를 치료한 의사가 틀니를 처음 하는 게 분명하다. 나는 실습 대상이었기 때문에 치료비를 반만 내겠다’고 소란을 피웠고 나는 과장님께 불려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조금 손놀림이 익숙해질 무렵, 아버지의 틀니를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해드릴 수 있었다. 대견해 하
지난 4월 12일 서울대치의학 대학원 명예교수 간담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작년말 본부 감사에서 본교에 박물관과 기록관이 있는데 “치의학 박물관”이 있어야 하는가? 교육연구 재단에서 운영비를 지급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는데… 대학원에서는 1922년 “경성치의학교”로 개교한 이래 5년후 100주년을 앞두고 준비사업을 하고있다고도 하였습니다. 치과의사학 전임교수나 교실이 없다는 것과 미국서 매릴랜드 치의학 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서울대 치대 요람에는 “치의학 박물관((Museum of Dentistry)은 일본인에 의해 서양치과 의학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기 시작한 이후를 중심으로 각종 치과관련 의료기기, 약품, 문서, 서적 등 1,500여종, 총 6,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국내 최초의 치의학 박물관으로 우리나라의 근대 치의학의 발달과정, 각종 치과용 기구의 변화, 그리고 서울대 치대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의 수집과 보관 및 전시에 주목적이 있다. 치의학 관련 유물을 수집하고 전시하여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후학들에게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치의학의 역사를 보존하는 자료 보존소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의
터키 이스탄불을 여행한 해가 2013년이었으니 어언 4년이 흘렀습니다. 그때의 느낀점을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기술하고 싶기에 글을 쓰지만 어디까지나 저의 기억에 의지한 여행후 후기이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이스탄불은 동로마의 수도였습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로마가 아닌 새로운 수도로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고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의 수도가 되어 나중에 이슬람 세력이 융성한 1453년 5월 29일에 슐탄 마흐메드2세에 의해 함락되어 비잔틴 제국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오스만제국이 서게 됩니다. 역사적인 배경이 이러한 이유로 이스탄불은 화려했던 기독교 세상의 문명과 그 이후를 지배했던 이슬람 세상의 문명이 공존하는 매력을 지닌 땅입니다. 또한 유럽과 아시아를 동시에 담고 있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건물이 또 묘하게도 기독교 문명의 정수인 소피아성당(아야 소피아)과 이슬람 문명의 정수인 블루모스크가 한 언덕위에서 위풍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소피아 성당이 180도 돌아 뒤를 돌아보면 블루모스크가 서로를 노려볼 듯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어떤 관광지에 저 둘 중 한 건물만 서 있
모처럼 맞은 휴가다. 어느 곳으로 갈까. 강원도나 경상도는 산이 높아서 계곡이 깊고 기암괴석 어우러진 골짜기의 물소리가 좋다. 충청도나 전라도는 평야가 넓어 시야에 다가서고 지나치는 풍경이 언제나 나의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넓은 대지와 뜨거운 태양에 익어가는 곡식을 보면 나의 삶의 어느 한 순간을 전원에서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어쨌든 계곡을 원하는 아내를 설득하여 남도여행을 하기로 했다. 차는 물과 야트막한 산을 지나고 이따금 보이는 갯벌과 흙빛 바닷물 출렁이는 서해안을 끼고 돈다. 충정도 경계를 지나니 붉은 꽃을 피운 키가 나지막한 가로수가 나의 시선을 끈다. 봄철의 가로를 밝히는 꽃이 벚꽃이라면 남도의 여름 가로수는 배롱나무라 할 정도로 많이 심고 가꾸어져 있다. 배롱나무는 자라서 나이를 먹게 되면 나무의 껍질이 벗겨지면서 매끄럽게 되는데 껍질을 벗듯 세속의 때를 벗는다는 의미를 가져서 예전부터 주로 서원이나 절들에 심어졌다고 한다. 요즘은 대량 재배하여 고속도로나 국도의 가로수로 흔하게 볼 수 있다. 붉은 꽃, 흰 꽃, 옅은 분홍을 한 꽃들이 있는데 봄철 단시간에 피어 한꺼번에 지는 벚꽃 보다는 여름 한철 피고 지는 기간이 100일 동안
진료를 한 시간만 빨리 끝내고 어떤 일정을 진행한다 해도 벌컥 화를 내며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원장이 있는가 하면 며칠을 통째로 비우는 일정을 흔쾌하게 수락하는 원장도 있습니다. 진료와 경영을 책임져야하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이어서 그러겠지만 평생 환자를 봐야 한다면 그 평생이란 긴 시간에서 며칠이란 작은 시간을 할애하여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것 같습니다. 감기에 걸려도 약을 먹지 않고 한숨 푹 자고 나면 쉽게 낫곤 했는데 작년에 일정을 마치고 한 달을 죽어라고 아팠습니다. 열이 나고 몸살이 심해서 그 좋은 계절 5월에 나들이 한번 못하고 진료가 끝나면 바로 집에 와 몸져누워 끙끙됐던 아픈 기억이 있어 올해는 운동도 하고 홍삼도 먹어가며 체력 단련을 했습니다. 또다시 여러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진료 준비를 마치고 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모두의 안전과 그리고 저에게 겸손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봉사하는 사람이 겸손하지 못하고 자기를 내세우면 상대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진료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의료진은 절대 갑이 되기 때문에 특히나 몸을 낮추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행여나 선교를 빙자한 의료 행
나는 평소에 시간약속을 약간 병적일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주위사람들로부터도 “융통성 있게 살아야지 그렇게 깐깐하게 생활하면 피곤해진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 애기를 듣게 되면 내가 너무 좀 심한가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치과개원을 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다. 대기실 벽의 페인트가 몇 군데 갈라져있는 게 보였다. 개원당시 공사할 때 인테리어 업체와 2년간 무상A/S받기로 계약되었기에 업체에 연락을 하여 인테리어 담당실장과 토요일 2시에 벽면 수리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 날이 되어 오전진료를 하고 있는데 담당실장으로부터 약속시간을 1시 반으로 당길 수 없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토요일 진료가 1시까지라서 문제될 것이 없겠기에 그러자고 하고는 진료를 마치고 인테리어 업체를 기다렸다. 그런데 약속한 1시 반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약속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흥분지수가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였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동안 들었던 주변의 충고도 있고 해서 전화하여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를 꾹 누르고는, 원래 약속시간이 2시였으니 2시까지는 기다려보자는 마음을 먹고 기다렸다. 하지만 2시 10분이 지나
힘들고 지치던 원내생 생활과 국가고시 공부를 마치고, 벚꽃이 피는 동안 훈련을 받고 나니 나는 공중보건의가 되어 있었다. 공중보건의가 되고 처음 느낀 감정은 바로 당혹스러움이었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공무원 신분이 되자마자, 나와는 달리 공직생활에 익숙한 직원들과 섞여서 생활하는 것. 그것이 나를 우선적으로 당황스럽게 했다. 내게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고, 내게 어색한 것이 당연할 때, 법칙과 규율을 따라 습관을 바꾸며 생활하는 것이 가면을 쓴 것 같았고, 훈련소 생활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치과의사로서의 역할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학생이었던 나를 믿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한 명의 치과의사로서 대하는 것은 아주 긴장되는 일이었다. 특히나 원인을 파악하기 힘든 통증을 주소로 내원하는 환자들, 그분들이 아픈 이유를 알려달라며 나를 쳐다볼 때마다 내가 치과의사로서 가진 지식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당혹스러움이 차차 가시자 두 번째로 다가온 감정은 막막함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년 뒤. 2020년 소집 해제될 때까지의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버리는 시간, 흘려보내는 시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