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가장 먼저 본 연극이 ‘전화벨이 울린다’란 작품이다.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친절과 웃음을 노동의 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감정 노동자인 콜센터 상담원들의 이야기다. 전화 상담원 수진은 고객에게 표현해야 하는 감정과 실제 자신이 느끼는 감정 사이의 간극, 즉 감정 부조화 때문에 괴로워한다.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유능한 선배 지은의 말을 듣고, 연극 배우 민규에게 ‘연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고객이 원하는 감정을 자신이 실제처럼 느끼고 ‘연기’하려는 노력이다. 수진은 연기 수업을 통해 가면 쓰는 법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찾아간다. ‘연기’와 ‘감정 노동’, 두 단어가 나를 극장으로 이끌었다. 두 번의 개원을 경험하면서 스트레스를 이겨낼 돌파구로 찾았던 것이 연극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경영과 소신 진료 사이의 갈등으로 혼란스럽던 첫 개원 때 처음 덴탈씨어터(연극을 사랑하는 치과인 모임)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혼란을 극복 못하고 치과를 접으면서 덴탈씨어터와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2년 조금 넘게 쉬는 동안 뉴질랜드의 한 작은 도시에서 여러 달을 머물렀다. 현지인들과의 교류가 조금씩 생기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치과의
세계 여러 곳을 안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누비고 다닌 어느 가이드가 꼭 가볼만한 여행지로 네팔을 꼽는 걸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언젠가 꼭 가보려고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네팔. 그 곳을 이번에 병원 식구들과 가게 되다니. 기뻤다. 걷고 또 걷는 반복되는 동작속에서 일상속에 묻혀서 하기 힘들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중요한 결정들을 내릴 수 있다고들 하는데 특히나 그 환경이 이 곳과는 너무나 다른 태초의 풍광속 이라면 좀 더 큰 생각들을 품어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히말라야 트레킹의 대표적인 코스로 푼힐(hill이라고 이름붙었지만 3000m가 넘는다고 한다)과 ABC가 있는데 신비로운 설산을 눈앞에서 보고 싶었기에 우리는 ABC로 일정을 잡았다. 병원 일정 조정 때문에 직항대신 경유를 통해 가느라 밤늦게서야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 일찍 포카라로 가기 위해 국내선 공항으로 이동했는데, 프로펠러로 돌아가는 정말 조그만 비행기를 보고 다들 꽤나 놀랐다. 그 좁고 흔들리는 기내에서 40분의 짧은 시간동안 커피를 나무스틱까지 챙겨 서빙해주는 승무원은 더 놀라웠지만 말이다. 창문밖으로 구름위로 솟은 설산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히말라야로 가고 있다는
저녁 모임이 있을 때 음주를 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자가 운전이 익숙한 관계로 대중교통은 잘 이용하지 않는다. 운전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대중교통이 편하지 않냐는 얘기도 하지만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로 아마도 그 만큼 편한 것에 길들여져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지만 의외의 변수는 일상생활에서 항상 존재한다. 잘 굴러다니던 애마가 속을 썩이더니 결국 몇일 정비소에 들어가 오랜만에 지하철을 이용하게 됐다. “간만에 지하철 여행이나 할까”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지하철에 올랐다. 타자마자 앉을 자리를 물색하는 내 모습을 보며 학생 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빈자리가 보여도 앉지 않곤 했는데 “너도 나이가 들었구나”라는 생각을 문득했다. 나이 드신 어르신이 몇 분 지나간다. 그 분들께 자리를 양보해야 하지만 오래 가야 하는 관계로 딴 짓을 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들 저도 무릎이 좋지 않아서요.” 예전엔 사람들의 손에 신문 또는 책이 들려져 있었지만 핸드폰을 들고 있는 모습을 제외하면 오랜만에 탄 지하철의 풍경은 많이 변하지 않은 듯 했다. 여느 사람들처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던 찰라 내 자리 바로 옆에 낯이 익은 내 또래의 남자가 눈에
나이 50이 넘어서부터 확실히 남자의 갱년기 시기임을 느낍니다. 소소하게 이유 없이 화가 나고 잘 삐집니다. 오늘도 아침에 별 이유 없이 답답하고 화가 나는 듯해서, 그리고 이 화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듯 해 역시 걸어보면 좋은 반응이 나올까하는 기대에 걷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2시간 정도는 계속 가슴이 좀 답답했는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답답함이 온 데 간 데 없어졌습니다. 그냥 걷고 있는 나만 존재하며 피곤함과 지루함보다는 잔잔한 재미가 몸을 편하게 합니다. 무슨 화가 있었을까? 찾아지지도 않습니다. 명상 같은 것은 가끔 의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경우가 많은데 긴 시간 걸으면 걷는 의지만 있으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편해집니다. 이러니 안 걸을 수가 없습니다. 몇 년 전 까지는 장거리- 최소 25~30km 이상-를 가끔 걸었으나 무릎을 삼하게 다친 이 후는 20km 정도에서 그쳤습니다. 다친 이유는 2012년에 100km, 50km 걷기대회 참가 이후 체력 관리가 잘 되고 제법 빠른 속도 이상을 낼 정도로 걷게 되자 자만심이 들어 산길도 조깅화를 신고 빠른 속도로 걸은 후유증입니다. 평지의 20km도 걸어보면 생각보다 긴 거리입니다. 몸에 무리가 덜 가고 적
그날은 정해진 날이다. 학교 처음 가는 날, 소풍 가는 날, 시집 장가가는 날, 예배당 가는 날, 팥죽 먹는 날, 고희 잔칫날,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애인 만나는 날, 손자 손녀 백일 날…. 정해진 날은 설레고 들뜨고 흥분되는 날이다. 밤잠을 자지 못하고 기다려지고 고대하는 날이다.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날이다. 특히 소풍가는 날아나 애인 만나는 날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날은 슬픈 날이다. 부모님 돌아가신 날. 어린 딸을 잃은 날, 낙방한 날, 실연을 맛 본 날, 부도가 난 날, 무언지 모르게 공연히 눈물 나는 날…. 이런 날이 없었으면 좋겠다. 정해진 날이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피하려 하고 잊으려 해도 자꾸만 생각나고 떠오르는 날이다. 그날은 잉태와 생산을 상징하는 날이다. 보통 그날을 손님 왔다고 한다. 즉 여성의 경도와 월경의 날이다. 이는 자손을 번식시키고 잉태를 나타내는 증표다. 그날 즉 손님이 없든가 고장이 나면 자손의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고 희망을 잃게 된다. 그래서 그날이 중요하고 꼭 있어야만 하는 날이다. 그날은 정년이 없다. 대체로 그날이라 하면 정해진 날짜와 한정된 기간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시작하는 날이 있으면 끝나는
설 명절은 무엇보다 조상님들의 보살핌에 감사드리며, 후손들에 대한 번성을 기원하는 것이 첫째일 것입니다. 설을 앞두고 가족들이 모두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면서 아버지를 통해 우리 가족사에 대해 또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입니다. 일제시대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여 가난을 대물림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두 형제분께서는 처자식 돌볼 겨를 없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온 몸을 바치셨습니다. 명절 무렵, 경기도 이천 고향에서 아버지 쪽 형제들이나 친척들을 만나 뵈면 어린 시절의 제 눈에 비친 모습에도 친척들은 대개가 못 배우고 가난해 보였는데, 왜 우리 집안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됐습니다. 우리 집안의 가장 큰 어르신이신 큰 할아버지(1878~1942)께서는 당신이 독립운동을 하셨던 자료들이 당시 각종 신문에 증거자료로 많이 남아 있었기에 비록 해방직후는 아니었어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 독립유공자로
하루하루를 여행같이 살고 싶은 생각을 늘 품고 생활을 해왔지만 진짜 여행을 기다리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나의 일상은 여행 같은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국가고시를 보자마자 떠나는 여행은 나에게 신혼여행이자 그간의 스트레스를 날리는 해방구였다. 국가고시를 핑계로 여행 준비는 모두 아내에게 맡겼지만, 설령 시간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분명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는 여행보다는 즉흥적인 모험을 하고 싶었고 기존의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 보다는 그 나라 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광객이 많이 가지 않는 비수기 여행을 즐기고 한 나라를 적어도 2번은 가보고자 했다. 이런 내 생각에 아내도 동의하여 우리가 한 번씩 가본 터키를 여행지로 삼았다. 이스탄불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바로 카파도키아행 비행기를 탔다. 카파도키아는 버섯 모양의 신비로운 기암괴석, 항아리 케밥, 동굴 호텔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열기구 타기를 필수 코스로 넣는데, 우리의 목적은 열기구가 아니었다. 그 지역 자체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었다. 동굴 호텔에 짐을 풀고 바로 마을 산책에 나섰다. 비수기
열린치과의사회가 지난 2011년 8월 8일 1차 인도네시아 진료를 시작으로 지난 연말 22차 진료를 다녀왔다. 자원봉사란 스스로 원해서 남을 받들고 섬긴다는 뜻이다. 단순히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자원봉사 활동인 것이다. 내가 주인이라는 성숙한 민주주의적 시민의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러한 봉사의 특징은 첫째, 자발적이어야 하고 둘째, 공익성 있어야 하고 셋째, 무보수성 넷째, 계획성 지속적이어야 하는데 열린치과의사회의 모든 진료는 이러한 순수한 자원 봉사의 개념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지금 것 지속 되고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 대가 없는 봉사는 언젠가 나도 그러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를 두고 우리의 조상들은 품앗이 한다고 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살기 좋은 공동체를 가꾸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열린치과의사회 봉사자 여러분과 함께 하는 봉사가 늘 고맙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소지하고 있는 잠재능력을 한층 더 발휘 하고 나의 삶을 긍정적으로 재인식 하는데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시가 문제를 풀기 위해 읽는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시를 통해 시험 점수 이상의 것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11월 21일과 12월 1일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강연호 교수님의 “시의 이해와 창작의 첫걸음”라는 특강을 듣게 되었습니다. 3시간의 수업에서 시의 기초 이해, 시적 형상화와 인식의 새로움, 시적 상상력과 삶의 변화, 치료로서의 시 읽기와 시쓰기, 시창작의 과정 등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시의 특징을 ‘느껴보는’흔치 않은 수업이었습니다. 시인이신 강연호 교수님께서 시를 쓸 때를 비추어 설명해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료인과 시인 모두 사람의 고통에 주목한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시에 대한 설명이 끝난 뒤 20행 이상의 시를 쓰는 시간이 40분 정도 주어졌습니다. 우선 시상을 찾기 위해 생활을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반복적이고 바쁜 일상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건 어릴 적 도서관을 다니게 된 이후 그 나이에 맞지 않게 놀지 않고 어른처럼 살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나를 다른 사람이 보면 ‘놀 수도 있는 걸 죄악시하고 노오오오력만을 중시하는 꼰대
바닷가 허허 벌판에 자그마한 2층 공항 청사와 얕은 건물 몇 채가 보이는 한적한 아이슬란드 국제 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기 문을 나서자 모자가 날려갈 정도로 바람이 불고 기온도 아이슬란드로서는 제일 더운 7월초인데도 우리나라 가을날씨 같이 싸늘하였다. 셔틀버스를 내려 공항청사로 들어가는 통로에는 출국자와 입국자가 뒤엉켜 복잡하였다. 앞서가는 승객들을 따라 출구로 나가니 짐 검사나 입국수속 없이 바깥으로 나와 레이캬비크행 버스에 탑승하였다. 다음날 골든 서클을 관광하였다. 귀들포스폭포. 간헐천인 게이샤르를 둘러보고 싱그베들리르 국립공원은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 유적인 930년 경 바이킹이 세운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의회가 세워진 곳도 있고 또 지리적으로 북아메리카 지각판과 유라시아 지각판이 갈라져 형성된 틈이 해마다 2센티 정도 움직이는 지형이 있어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뢰이가베귈린 트랙의 7일간 트래킹이 시작은 1시간 반 정도 포장길을 달리고 강을 따라서 난 비포장도로로 계곡을 들어가 능선을 넘기를 몇 번. 저 멀리 호수가 보이고 시커먼 바위들에 둘러싸인 산장이 보였다. 트래킹 출발지인 해발 700여 미터의 란드만날나우가르에 도착.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윈스턴 처칠의 명언을 치과계에 대입시켜 보면 치의학 역사를 잊은 치과계에 미래가 없다는 해석이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역사의 교훈을 거울로 삼는다면 흔들림 없는 정체성을 지닌 치과의사로서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 때문에 치의라면 치의학 역사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치의학 역사는 어디서 어떻게 배우나요? 이러한 질문을 하실 분들을 위하여 먼저 두 권의 책을 추천하고 싶다. 치아 인문학(한상국 저, 대한나래출판사, 2014)과 치의학의 이 저린 역사(김준혁 역,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5). 이 책들을 읽으면 다른 시대의 여러 치의들을 만나서 그들의 좌절과 성공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 우리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역사를 알게 되고, 역사는 사적인 경험으로 반복된다. 그래서 역사는 미래를 볼 수 있는 과거의 거울이라고 하나보다. 이순신 장군이 아직 남아 있던 12척의 배로 나라를 구했듯이 30여명 남짓 치과의사들은 치의학 역사를 공부하면서 대한치과의사학회(大韓齒科醫史學會)를 56년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짧지 않은 학술단체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치과의사들이 대한치과의사협회(大韓齒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