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책 선물을 받았다. 묵직하다. 이걸로 사람을 때리면 흉기가 될 것 같다. 총 340페이지, 다 읽어볼 엄두가 안나 슬쩍 넘겨가며 봤는데, 대하소설 같다. 그런데 웬일인지 책에서 땀 냄새가 난다. 그동안의 수고에 백만스물두번의 박수를 보낸다. ======================================== 2002년 가을 어느 날, 송천동 예비군 훈련장에 있었다. 국가의 부름을 다시 받아 예비군소집에 처음으로 응한 것이다. 4일 비동원 훈련이다. 선배들이 팁을 알려줬다. “가기 전날부터 그 기간 동안 웬만하면 밤에 잠을 자지 마라. 낮에 잠이 안 오면 너무 힘드니까” 거기서는 잠깐 뭐 하는 것처럼 하다가 (조금 지나면) 이제부터 쉬는 시간이라며 쉬라고 하였다. “금방 쉬고 있었는데, 뭘 또 쉬라는 거야?” 그 흐름은 4일 동안 반복되었다. 같이 훈련받는 친구(이성오. 진안치과 원장)가 옆에 있을 때는 나름 지루하지 않게 보냈지만, 떨어져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틀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 했는데, 3일이 넘어가니까 너무너무 힘들었다. 나는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지랄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그런 것이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었다면
치과의사로서 일을 하다보면 하루하루 직업생활에 매몰되어 때로는 의미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행하고 있는 매일매일의 진료가 환자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 나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고 있는지 피부로 느껴지지 못하고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수도 있었던 찰나의 어느 초여름날. 2016년 기록적이었던 폭염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 선선하던 6월말, 저는 올해 키르기즈스탄 해외의료봉사단장을 맡으신 박건배 前 총동창회장님께 이번 의료봉사에 대한 권유를 받았습니다. 사실 그 당시 저는 곧 있을 치과개원을 준비하려던 참이었는데, 뭔가 의미있는 일에 대한 갈증이 조금씩 쌓여갈 때쯤 이번 봉사사업을 접하게 되었고, 저로서는 별다른 고민 없이 참가를 결정하게 된 것을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참 의미있었던 순간이었던 듯 싶습니다. 물론 이번 9월 13~18일 해외의료봉사는 올해 징검다리 추석연휴기간이었던 닷새를 포함한 기간이었기 때문에 저로서도, 그리고 다른 봉사단원들에게도 비교적 부담없는 기간을 할애하여 다녀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올해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대학원 총동창회 주최 키르기즈스탄 해외의료봉사는 2년전 1회를 시작하여 올해
어느덧 본과 3학년이 끝나가고 있다. 처음 치전원에 1학년으로 들어와 학기 생활을 한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1학년 때는 1학년이 힘들었고, 2학년 때는 2학년이 훨씬 힘들었고, 3학년인 지금 지금도 힘들지만 지나고 보면, 힘들었던 1, 2학년 생활이 추억으로 남았듯 지금 이 힘든 시간들도 즐겁게 보내면 나중에 추억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요즈음만큼 옛날 생각이 많이 나는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왜 이렇게 옛 시절의 추억을 많이 떠올리고, 그리워하는지… 아마도 요즈음 이 시기가 힘들고 너무 감정이 메말라져 있는 것 같다고 이글을 쓰면서 느낀다. 지금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예전처럼 편하게 만날 수 없는 것 같다. 이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지, 나는 또 무슨 말을 해야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지 고민을 한다. 그래서 나는 막 대학교를 입학한 신입생이나, 또는 그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매번 느끼는 것 같다. 요즘에 시간이 날 때마다 ‘응답하라 1988’드라마를 다시 보고 있다. 내가 태어난 해인 1988년이라서 잘 알지 못하지만, 드라마에서 학생들이 자라나는 과정을 보고 나
제가 장애인 진료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약 15년 전으로 기억 됩니다. 매주 목요일 천안으로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다니던 청주 지역의 원장님들과 의기투합이 되어 시작한 일이 매주 일상이 되고 정착이 되어 지금까지 쉼 없이 이어오고 있습니다. 당시 약 300여명의 장애인이 생활하고 있는 충북재활원에 정부 지원 사업으로 치과유니트와 간단한 진료 장비를 갖추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공중보건의 배정 등 추가적인 의료인의 지원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여러움을 겪던 중에 진료봉사를 하게 되었고 꾸준한 이 경험이 씨앗이 되어 약 10여년 후인 2014년부터 더 많은 치과의사가 참여하고 청주시와 장애인 단체가 협력하는 형태의 재가장애인을 위한 작은 진료소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 과정에서 쌓인 장애인 진료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으로 작년부터는 청주시의 모든 치과유관단체들과 뜻을 모아 청주맹학교에서 구강보건교육, 불소도포, 구강검진, 치과치료 등을 동시에 진행하는 ‘장애인 구강건강 사랑나눔’ 행사를 개최하기 시작하였고 올해도 많은 치과가족들의 자발적, 적극적 참여와 후원으로 무사히 봉사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장애인 진료사업은 보건의료 수혜에 자발적으로
치과대학 본과 2학년은 실습수업으로 가득하다. 우리 학교의 경우에는 모든 임상 전 단계 실습이 본과 2학년에 집중되어 있고, 이후 본과 3학년부터 9주 동안 9개의 과를 돌면서 배우는 임상 단계 실습(학교마다 명칭이 다른데, 우리학교에서는 이를 ‘로테이션’이라 부른다)이 진행된다. 학기의 반을 실습, 그 것도 대부분을 기공실습으로 보내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실습에 필요한 각종 기구들로 가득 차 있는 ‘기구통’이란 공구상자를 갖고 다닌다. 본과 1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나면 선배들과 1대1로 매칭 하여 이 기구통을 물려받게 되는데, 그제서야 우리들은 본과 생활의 1년을 마치고 치과대학 생활 중 가장 힘들다는 본과 2학년이 되었다는 생각에 들뜨고 설렘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방학기간이 지나고 본과 2학년 1학기가 시작되면서 모두가 멘붕에 빠진다. 처음 만져보는 핸드피스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버들, 알지네이트 인상에서와 석고모형에서 사라지지 않는 기포들, 그 외에도 다루기 힘들 재료들과 내 마음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기공물들은 치과대학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내가 적성을 잘못 선택한 건가’라는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그러한 자괴감과 함께, 시험기간에
보통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지만 나는 그쪽으로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좌절 비슷한 걸 느끼려던 찰나에 ‘핑거스타일’을 만나게 되었다. 대신해서 노래도 불러주고 반주도 해주고 때로는 쿵작쿵작 리듬악기와 같은 역할까지 해주니 금상첨화였다. 보통 접하게 되는 잔잔한 곡이나 사람들이 많이 연주하는 곡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해 화려한 기술적인 부분이 많이 들어가 있는 곡부터 무작정 시작하게 되었다. 그 곡을 연습할 때 손톱이 잘 맞지 않고 내려칠 때도 자꾸 엉뚱한 부분이 맞으면서 손에 상처가 나고 물집이 잡히고 아팠다. 덕분에 치과에서 알코올 솜을 다루게 되는 순간과, 환자를 보고 난 뒤에 글러브를 벗고 손을 씻는 순간은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었다. 그 고통은 표현하기 힘든 것 같다. 그럼에도 ‘고통스러움’보다는 ‘행복감’을 느꼈다. 소리가 아주 어설펐지만 조금씩 나온다는 것이 신기했고 주변에 핑거스타일의 주법을 연주하는 여성 아마추어 연주자가 드물다는 것이 강한 메리트로 다가왔다. 가끔씩 점심시간에 치과에서 연습을 하고는 했는데 도중에 환자분들이 오시면 앞에 앉아서 구경하시고는 했는데 (김영란법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순간적이고 거창한 진료 봉사가 아니라 미약하지만 지속적으로 행하는 봉사가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더 필요합니다.’ 길고 힘들었던 치과대학과 수련생활을 마치고 발령받은 시골보건소의 첫날이 생각납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시간적 여유와 자유스런 시골생활이 마냥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곧 무료해지기 시작하더군요. 이 주어진 공보의의 여유를 어떻게 보내야할까 고민하게 되었고 그 고민을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진료봉사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실 진료봉사는 막연하게나마 어릴적부터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던 부분이지만 한번도 구체적으로 계획해 보지 않았었기에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먼저 어디서 진료를 해야할지, 그곳에선 단체도 아닌 한명의 치과의사를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었고 시설, 장비도 막막했습니다. 포기할까? 나중에 할까? 답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시작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기는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일단 찾아가서 시작해보자고. 손에 currette 한 세트만 달랑 들고 생면부지의 중증 장애인 요양원으로 향했습니다. 의사소통이 되지도 않고 지체가 부자연스러운 한 명의 장애우를 진료하기
치전원 학생일때의 일이다.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캄보디아로 의료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었다. 아직 원내생이 되기도 전이어서 할 줄 아는 건 없었지만, 그냥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또 외국에 나간다고 생각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참석하였었다. 현지에 파견되어 있는 한국 NGO 직원의 도움으로 봉사지와 기간이 정해졌다. 봉사지는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있는 학교였고 그 근처로 형성된 도시 빈민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활동이었다. 봉사 2일째 우리는 뜻밖의 초대를 받았다. 현지 학교 관계자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은 것이다. 봉사 4일째 저녁식사였는데 알고 보니 마침 학교 행사 일정이라서 우리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외국인 NGO 사람들도 참여하는 저녁식사라고 했다. 활동이 조금 일찍 끝난 그날 대원 한사람의 제안으로 우리는 그 저녁식사에 한국음식 한 가지를 가져가기로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들을 보니 냄새가 폴폴 나는 김치종류와 장아찌 종류밖에 없는데 왠지 이것들을 가져가자니 문화적 충격이 너무 클 것만 같았다. 한창 의욕이 넘치던 젊은 시절의 우리는 김밥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현지 NGO 직원의 도움으로 시장을 돌며 김밥 재료를 찾기 시
“딩동” “○○○님이 하트 1개를 선물하셨습니다.” 헉! 누구? 하트를 보낸 사람이 누구라고? 눈을 여러 번 비비고 다시 보아도 이 분은 나의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틀림없었다. 선생님께 모바일 폰 게임 아이템을 선물 받다니 이 상황이 참 재미있다. 고등학교 3학년. 입시 스트레스로 하루하루가 힘든 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예민하고 까칠한 여고생의 담임을 맡으시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10년도 더 지났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욕심 많고,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의 목표를 세우고, 마음대로 안 풀리면 스트레스 받고 실망하는 몹쓸 성격의 소유자다. 자고로 꿈은 크게 가지랬다는 합리화는 덤이다. 성격 탓인지 수많은 고비를 마주 할 때 마다 이 산을 넘을 수 있을까, 이 고비가 끝이 나긴 할까 등의 걱정으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 때마다 마음을 다 잡게 해 준 것이 고등학교 3학년 때의 급훈 ‘우공이산(愚公移山)’이었다. 급훈을 기억하고 있다니 이런 오글거리는 상황이 또 어디 있을까 싶지만, 신기하게도 힘들다 느낄 때 마다 이 글귀가 문득 문득 생각이 났었다.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겨놓는다는 말로 열자(列子
3년 전 부산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을 앞두고 치과의사 국가고시 준비를 위해 정독실 죽돌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나. 매일 츄리닝에 슬리퍼 차림으로 정독실에 눌러앉은 지 벌써 1달이 지났다. ‘오전수업→정독실→점심식사→정독실→저녁식사→정독실→침대’의 반복되는 일상들. 물론 중간중간의 휴식타임도 포함되어있다. 정독실에 막상 책은 펼쳐놓고 있지만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런 저런 생각들만 머릿속을 맴돈다.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울려 퍼지는 몇 년 전 노래가사들에 지난날의 기억들이 떠오르고, 이어지는 상념들에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저 멀리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핸드폰을 한번 들면 기본 30분. 이런 저런 뉴스 기사 가십거리 등등을 보거나 친구들에게 쓸데없는 안부를 묻는다. 그러던 와중에 예전에 즐겨봤던 만화 ‘슬램덩크’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학창시절을 함께 해주었고, 내가 힘들 때마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친구이자 동반자 같은 만화. 이 만화를 모르는 20~30대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명장면들과 명언을 쏟아낸, 풍요 속 빈곤으로 언급되는 요즘 만화와는 차원이 다른 명작 중의 명작. 불
여행의 즐거움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크게 일상을 떠나 자유로움과 쉼이 있겠고, 새로운 문화나 사람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보는 즐거움이 있고, 또 하나는 먹는 즐거움. 크게 3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여행을 가려면 내가 어떤 스타일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먼저 나의 여행스타일을 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나는 먹는 즐거움을 원하는데 같이 간 동행자는 보는 즐거움을 더 원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맛있는 집 찾아가서, 때로 줄서서 기다려서 먹어야하는 그 시간이 아깝고, 그냥 대충 아무거나 먹고 그시간에 어디 미술관을 가든지, 어디 시장을 가서 무엇을 더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나고 불평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먹는게 중요한데 다른 사람 눈치보느라 ‘난 괜찮아’하고 양보하고 밀려서 원하는 식당에 가지 못하고, 먹고 싶은 그것을 먹지 못했으면 돌아와서 계속 아쉽고 섭섭하고 뭔가 부족한 것 같아 여행의 만족도가 떨어진 경험을 한번쯤은 해 보았을 것이다. 나의 여행의 즐거움은 먹는 즐거움이 크다. 일상에서 벗어나 쉬고, 새로운 문화와 낯선 것들을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 나라 음식, 그 나라 분위기를 느끼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