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참 혼자라는 게 트렌드인가 보다. 온 세상이 혼자 열풍이다. TV에서는 혼밥, 혼술 열풍이고 서점에 가도 나 혼자 즐기는 xx, 나 혼자 떠나는 xx 이런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런 트렌드가 절묘하게도 내 삶의 곡선과 시기에서 접점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학교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지냈고, 대학교 입학하고 자취를 하며 자립하긴 했지만 친구들과 몇 발짝 안떨어져 살았기에 거의 마을 공동체와 같은 생활을 하였었다. 그렇게 어울려 지내다 보니 그 당시에는 혼자라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다. 혼자 밥을 먹으면 안되고, 혼자 여행을 가서도 안되고, 혼자 운동을 해서도 안되고 그런 규율을 사회가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내가 그저 혼자 무엇을 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어서 혼자가 되기를 꺼려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변했던 시기는 공중보건치과의사로 일했던 3년간이었다. 동료 의사들이 근처에 있긴 하였지만 예전에 보냈던 나의 학창시절과는 많이 달랐다. 예전에는 나와 하루 스케줄을 공유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혼자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동료들과 같이 밥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혼자 밥을 먹는 시간도 늘어났다
얼마 전 자동차를 바꾸었다. 누구나 새 차에는 애착이 가고 신경을 쓰게 마련이다. 그런데 조심을 하고 주의를 기울이면 기우릴수록 여기저기 부딪치고 까지고 터진다. 희한한 일이다. 아마도 새 차에 대한 적응이 안 된 탓이리라. 예전 차에 익숙하다보니 새 차는 서툴고 부자연스러운 게 사실이다. 나도 3일이 안 돼 앞 범퍼가 주차장 기둥에 걸려 찢겨 나가 80만원의 수리비가 들었다. 나의 부주의이지만 얼마나 화가 나고 아까운지 모르겠다. 밥맛이 없을 정도이다. 물론 언젠가는 스치고 박고 부딪치고 깨져서 중고차가 되게 마련이지만 처음 몇 달은 새 차에 대한 관심이 애지중지해 작은 흠집이라도 용서를 못하고 끙끙 앓게 된다. 그 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가물다가 오는 비라 모두가 반기는 비다. 급한 볼일이 있어 작은 시장 통을 초저녁에 지나게 되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데 좁은 골목통 앞에 SUV차 한 대가 마주 오고 있다. 비 때문에 후진하기도 시야가 나쁘고 옆으로 피하자니 피할 간격이 없다. 차 운전을 하루 이틀 한 처지도 아니니 공연한 자존심과 과욕을 부려 옆으로 약간 피하면서 앞차가 지나가게 자리를 마련하려 했다. 이게 잘못된 계산이고 주제넘은 착각이었다. 나
요즘 부쩍 더우니 우리 병원에 근무하는 직원이 “원장님 너무 더워서 출근하기 힘들어요. 더울 때는 좀 쉬면 안 돼요?”라고 애교 섞인 농담을 한다. 나는 대답하길 “너는 내가 쉬는 날은 당연히 쉬고 연차도 있잖아. 내가 30살 이상 나이가 많은데도 일하는 시간은 더 많은데?” 라고 농담을 한다. 돌아오는 대답이 “원장님은 돈이 많잖아요” 라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사실 내가 많이 쉬지 못하는 게 환자에 대한 의무일까? 매출에 대한 욕심일까? 의무와 욕심 중 어느 쪽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할까? 이런 의문을 문득 가져 본다. 개업한 지 30년 가까이 되는데 처음 개업했을 때와 비교하면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안정이 되었는데, 일하는 시간은 5% 정도 준 거 같고, 노동 강도는 20% 정도 강해진 거 같다(통계적 근거 없이 막연히 내가 느끼는 것). 그러면 행복지수는 얼마나 올랐을까? 아니면 내렸을까? 참 어려운 문제이다. 사람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바는 주관적이지만, 객관적 조건들에 영향을 받지 않기는 상당히 어렵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시장에서의 성공이 모든 걸 정당화하고 가능하게 하며 모든 이론을 대체하는 시대이다. 또한 행복이 기대치에 대한 만족도라 생각
서울대 치과병원의 역사는 경성치과의학교 치과병원(1922.4.1),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치과병원(1928.1.25), 경성치과대학 치과병원(1945.11.1), 국립서울대치대 부속병원(1949), 피난시대의 서울대치대 부속병원(1953.4), 연건캠퍼스의 서울대치대 부속병원(1970~1978), 서울대병원 치과진료부(1978.7.14), 서울대병원 치과진료부 치과병원(1993.5.18) 그 후 서울대병원에서 특수법인인 서울대치과병원(2004.9)으로 발전 되었습니다.(김영해 48년 치대졸 ; 서울대동창회보 제65호 1983.8.1 p.4 치대편, 한기언 49년 사대졸 ; 제 151호 1990.10.1 p.4 서울대의 뿌리 27 치과대학,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사 제2권 1922~2001 p.450에서 인용) 1987.12.30일자 서울대총장(기획 01402-318)으로부터 서울대발전 장기계획 1단계 사업중 연건캐퍼스 계획으로 책정된 ‘치학교육 연구동’ 및 ‘치과진료부’ 시설 사업의 조속한 추진을 위하여 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으로 임명한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1988.1.25일 교수회관 외빈실에서 ‘치학교육연구동 및 치과진료부 신축계획(안)심의’가 열렸는데
일을 마치고 올라 탄 지하철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만원이다. 요즘 같이 30도를 웃도는 고온에 장마철까지 겹쳐 습기까지 높으니 사람마다 표정이 좋지 않지만 그나마 빵빵한 에어컨이 더위와 습기에 찌든 꿉꿉함을 지울 수 있다는 게 천만다행. “에어컨 없는 소싯적엔 어찌 살았을까?” 에어컨 덕에 더위가 좀 가시니까 본능(?)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으로 손이 간다. *톡을 통한 친구들과의 대화, 챙겨보지 못했던 드라마 섭렵, 포털 사이트에 뜬 메인 뉴스 등을 검색하다 보면 어느 새 다음역이 도착지다. 지하철에서 내리려 대기하고 있는데 눈에 띤 지하철 공익 문구. 문구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휴대폰만 보고 있으면 정작 옆에 있는 인연을 만날 기회를 놓친다는 내용이다. 휴대폰 사용을 적당히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지라는 공익성 광고인 듯하다. 과연 휴대폰을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 지하철의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백이면 백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핸드폰으로 고정돼 있다. “과연 지하철에 공익광고로 등장할 정도로 휴대폰 과다 사용은 일상이 돼 버렸다.”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만큼 똑똑해진 휴대폰이 상용화 되면서 몇 년 새 다양한 생활 풍속을
저는 누군가에게 저를 소개할 때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는 행복한 치과의사입니다.”라고. 저는 학생 때부터 하고자 하는 바가 뚜렸했었습니다. 여자이긴 하지만 개원해서 내 병원을 갖고 그 안에서 좋은 진료를 하고 싶다는 것. 2학년 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수련을 받는 것이 꼭!! 필요한지 고민했었고, 수련 안 받으신 선생님들은 세미나 같은 것들을 들으면서 공부를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도대체 그 세미나가 어떤건지 알아보기 위해 선배님한테 부탁해서 원장님들이 들으시는 세미나를 들어보기도 했습니다. 수련기간 없이 바로 나가기로 결정한 이후로는 졸업 후 바로 원장님 소리 들으면서 환자를 봐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겁도 나서 치대도서관에서 임상책들을 자주 꺼내 봤었습니다. 원내생 때 서지컬 발치만 48개를 하고 졸업했고, 교정기공으로 토이셔 장치도 만들어보고, 교수님 옵저를 많이 했었습니다. 그러다 지치고 스트레스 받을 땐 원내생 기공실에 앉아서 조용히 기공들을 몰아서 하다보면 다시 기분이 풀리곤 했습니다. 간혹 한번 씩 동기들한테 “놓고가~ 해줄게~” 하는 말을 덧붙이고는 마치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앉아서…졸업 후에도 일이 끝나면 집으로
7월 2일 해남윤씨 종가인 녹우당을 비롯한 해남 일원으로 조선대학교 총동창회서 마련한 남도문화유산여행을 다녀왔다. 아침 9시에 출발하여 해남으로 가는 길에 강진에 있는 모전석탑인 월남사지 3층석탑과 제2대 조계종 국사인 혜심 진각국사비를 둘러보고 녹우당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녹우당 내부를 관람하기 어렵지만 특별한 행운으로 녹우당을 직접 돌아보게 되었고 장마기간이라 며칠전부터 비가오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하늘이 돌보심인지 다행히 여행내내 비를 거의 맞지않는 행운 또한 누리게 되었다. 해남에서 유명한 닭 코스요리로 점심을 마친 후 인도에서 온 돌배에 실려있던 소가 마지막 쓰러진 곳에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미황사 및 부도밭을 둘러보았다.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 기암절벽과 미황사의 조화는 절경이라 할 만 하였다. 철제 비로자나불이 있는 은적사를 거쳐 마지막으로 나주향교를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일정을 마무리하였다. 2015년 우연히 공재윤두서의 서거 30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을 듣게되고 해남윤씨 집안에서 보유하고 있는 유물전시회를 관람하면서부터 공재 윤두서와 해남 윤씨 집안과의 인연이 시작되게 되었다. 이번에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총동창회장이 된 후 남
전업 작가의 꿈을 안고 제주로 이민(?)을 온 지 반 년이 넘어간다. 나를 처음 맞이한 것은 바람이 거센 겨울의 섬이었다. 이사 전날 밤 9시까지 환자를 마무리 짓느라 무리했던지 후두염에 걸려 한 달 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름 혹독한 입도식이었다. 건강이 회복되자 노트북을 들고 전망 좋은 카페를 찾아다녔다. 육지에서 십여 년 간 꿈꾸던 라이프스타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작품이 잘 써지지 않았다. 카페에서 하루 종일 세찬 바람과 싸우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제주도의 글쓰기 좋은 카페 100선”이라는 정보서를 쓰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치과를 할 때 틈틈이 써두었던 글을 다듬었지만 신작은 잘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연초-정확히 1월 3일-에 한 출판사로부터 작품 의뢰가 들어왔다.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주는 “고양이 탐정”에 대한 작품을 써달라는 기획이었다. 별로 내키는 소재는 아니었지만 이로써 신작 구상에 대한 고민이 약간은 덜어졌다. “고양이는 아홉 개의 생명을 가진다. 어둠속에서 고양이를 노리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로부터 고양이를 지켜라. 고양이 탐정!” 이런 공포 컨셉에 제주도의 전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으뜸을 달리는 통계수치들이 여러 가지 있다. 반도체 생산량, 철강 산업, 초고속 통신망과 컴퓨터, 스마트폰 보급률, LCD TV 생산, 조선 산업 ….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지만 빛이 밝으면 어둠이 짙듯이 선진국들의 경제협력기구인 OECD 회원국 중에서 자살률은 가장 높고 출산율은 가장 낮으며, 단위 인구 당 성형수술 비율에선 압도적으로 1위를 달린다. 살다가 힘들고 지쳐서 목숨을 끊는 이가 가장 많은 나라.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아 키우기가 가장 힘든 나라. 태어난 자기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서구인의 외모를 표준으로 삼아 이목구비를 뜯어 고치는 이들이 가장 많은 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만7000달러에 육박하기에 대부분 먹고 살만할 텐데도 하루하루가 힘든 곳이 지금의 이곳 대한민국이란 말이다. 영국의 옥스퍼드 인구문제연구소에서는 대한민국의 출산율 저하가 이대로 지속되다가는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사라질 나라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정부에서는 결혼을 아예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초혼 시기가 점차 늦어지는 것이 저출산 문제의 원인이라고 분석하면서 청년 세대의 결혼과 출산을 지원하는 다양한 정책을 내놓는다. 또 자살자를 줄이기
7월의 지중해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으며 태양빛은 강렬했으나 습기가 없어 무덥지 않았고 그늘에서 태양빛만 피하면 선선하였다. 로마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해 한참을 달려 2천년 전 베수비오 산의 화산 폭발로 땅 밑으로 사라진 비운의 도시 폼페이를 관람 후, 버스는 어느덧 쏘렌토에 다다르고 있었다. 쏘렌토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매혹적인 노래로 뱃사람들을 홀려 바다에 빠져 죽게 했다는 인어 아가씨 세이렌의 유혹으로 유명한 바다 도시이다. 멀리서 보는 쏘렌토는 생각보다 훨씬 아담한 마을이었다. 에메랄드 빛의 지중해 바다와 절벽 위에 펼쳐진 평지에 파스텔 톤의 낮은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몰려있는 마을을 보니, 세이렌이 아니더라도 배를 타고 바다를 나가고 싶은 충동이 생길 것 같았다. 쏘렌토에서 포지타노로 가는 도로는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도로로 모퉁이마다 마주 오는 차가 어느 한쪽이 서거나 속도를 줄여야 할 만큼 매우 좁다. 게다가 길 아래로는 바다로 솟구친 까마득한 절벽으로 버스가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버스 안에서는 연신 두 가지 소리가 뒤섞여 나왔는데 곡예운전에 따른 긴장 어린 신음소리와 순간 순간 펼쳐지는 해안
8년쯤 전인것 같은데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약속을 한적이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강아지를 키우게 해주겠단 약속. 강아지를 결정하고 멀리서부터 가정견을 입양을 했다. 그의 이름은 토리이며 남아였다. 처음엔 그냥 강아지라고만 생각하며 키우기 시작했고 그냥 집을 지키는 강아지였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는 어느새 우리의 가족이 되어 우리집의 막내가 되어가고 있었다. 토리는 그렇게 우리집의 지키미 강아지이고, 낯선이로부터 가족을 지켜주는 작지만 강한 아이였고, 우리를 웃게하는 애교쟁이였다. 그렇게 가엽게 집만 지키던 토리에게 항상 미안해 하면서 시간이 흘러갔다. 그 아이가 외로울까봐 파양도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함께 지나온 시절이 8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토리가 병이 났다. 입원을 반복하면서도 그 아이는 잘 버텨 주었다. 딸 아이가 대학을 가면서 집을 비우게 되어 토리와 함께 할머니댁에서 토리와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받고 토리는 잘지내고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말벗이 되어주고 일거리를 주는 그런 토리였다. 그는 애완견이 아닌 반려견이 되어있던것 이다. 그런 그에게 다시 병이 생겼다. 가끔씩 발작을 하는 병이 생겨 1년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