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말부터 금연치료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지원사업으로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전산프로그램으로 금연의료인의 사용에 다소 불편함이 있었지만 이제는 보완되면서 안정화되었다. 최근에는 금연성공을 판정하는 기준까지 확정되어 금연프로그램은 전 과정이 완성되었으며 참여자나 의료인 모두 불편함 없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금연은 특성상 5~6월이 되면 연초(年初)보다는 흡연자들의 관심이 확실히 줄어드는데 이런 시기에 성공 사례 등을 공모전을 통해 발굴하고 홍보하면 예비 참여자들에게 동기부여의 기회가 되고, 참여 의료인에게는 금연치료를 되짚어보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다. 나 또한 금연을 성공하신 분들에게 받았던 긍정의 힘을 동료 의료인에게, 그리고 금연치료를 받으실 분들께 전해 드리고 싶어 용기를 내어 공모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치과의사가 된 이후 환자들에게 구강(口腔)건강을 비롯하여 여러 이유로 금연을 자주 권유했지만 실제 말하는 것 이외에 특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일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본인의 의지로만 금연을 하고 있었고 금연치료에 도움이 되는 보조제나 약은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시절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이 무엇인가요?’ 혹은 ‘어떤 꿈을 갖고 있나요?’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 어렸을 때는 꿈에 대해 생각해본 경험이 많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직업을 갖고 직장에 다니면서 꿈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된다. 병원의 내부고객, 즉 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도 꿈을 갖고 있지 않은 채 시계추처럼 출퇴근만 반복하는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9시에 출근해 7시에 퇴근하는 반복적인 생활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근무를 하다 주변을 살짝만 돌아보면 한숨을 쉬는 사람, 표정이 어두운 동료를 볼 수 있다. 병원의 중간관리자라면 구성원의 표정이나 행동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한다. 내부고객도 병원에서 근무하며 일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일을 할 때 느끼는 즐거움과 행복을 배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말리언스 대표이자 메디컬드림마케터로 활동하면서 병원의 내부고객을 대상으로 드림맵 컨설팅을 진행하며, 나는 특히 이런 부분에 주목했다. 지금 연차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팀장을 준비해야하는 연차, 실장을 준비해야하는 시기, 또 실장에서 병원 전체를 관리하는 총괄실장을 준비하는 단계 등 내부고객이 앞으로 어떤 목표를 가져야 할지
정년퇴임하고 개원가에 나와서 치열한 경쟁에 놀라면서 내 발걸음을 조절하기 위하여 그 동안 정리 해오던 임플란트 치료가 중심인 ‘전신질환과 치과치료’와 치과의사를 포함하여 일반 학부모를 대상으로 자녀 구강관리를 위한 ‘100세의 구강관리 0세부터’라는 책 두 권을 함께 발간하였다. 어쩌면 더위를 견딜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같은 가운데 환자 진료의 기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일이 있었다. 최근에 경험했던 일을 예로 들어 나를 되돌아보려한다. 8주가 조금 넘었다. 테니스를 치다가 오른쪽 팔꿈치가 오른쪽 아래 갈비뼈 부위에 낀 채 그대로 엎어졌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혀 잠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촌 동생이 정형외과 교수라 집 근처에 알만한 정형외과가 있는지 물어보니, 첫마디가 갈비뼈는 정형외과가 아니고, 흉부외과나 외과에서 진료한다고 하면서 아는 곳이 없다고 하여, 그래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테니스장에서 동료가 추천해준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요즘 보기 드문 X-선 필름을 사용하여 가슴사진을 3장 찍고, 검진 후 45분간 4~5가지 물리치료도 받고 18,000원을 지불했다. 약값은 빼고. 야! 싸다는 생각을 했다. 약은
어느 포털 사이트에서 찾은 처서(處暑)의 사전적 의미. 여름이 지나면 더위도 가시고 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 즉, 더위가 그친다는 뜻. 연일 일기예보에서는 입추다, 처서다 하면서 이내 가을이 올 것처럼 얘기하지만 지금과 같은 더위라면 12월에도 반팔을 입고 다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좀 오바인가? 일기예보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불볕더위’, ‘가마솥 더위’, ‘기상관측 사상 최고의 무더위’, ‘한반도 불가마’. 올 여름 살인적 더위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더위를 표현한 최상급 단어들이 부끄럽지 않다. 피해 때문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예전엔 가끔 태풍도 와서 그럭저럭 더위를 좀 날려 주곤 했는데, 올해는 한반도 주위를 감싸고 있는 무더운 기단에 막혀 태풍이 접근을 못하고 있다니 역대급 더위이긴 한가 보다. 오늘도 낮 최고 기온 36도. 지열 때문에 체감 온도는 거의 40도 육박. 점심 먹으러 잠깐 나온 지 5분 만에 머리에 송글송글 땀이 찬다. 점심 메뉴보다 빨리 더위를 피해 어디든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 잠시 땡볕을 걸으면서 올해만큼 가을을 기다린 적이 있나 싶어 지나간 과거 여름들을 생각해 본다. 대략 여름 휴가가 지나면 선선한 바람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 문제 한문제를 풀 때마다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왠지 모를 기쁨이 있었다. 그런데 몇몇 친구들은 공부는 하지 않고 축구나 농구 등의 운동을 열심히 했다. 그때는 그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운동이 주는 즐거움을 알지 못했다. 대학교, 대학원을 거치면서 수많은 학문이 주는 즐거움을 느꼈다. 어떤 때는 연구에 막혀서 좌절도 하고 어떤 때는 연구의 돌파구를 찾아서 기뻐도 하면서 인생의 즐거움은 오직 무언가를 배우고 연구할 때만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내가 입학할 대학교는 수영이 필수 과목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수영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영장에 가서 강습을 받았다. 물을 두려워했던 나는 강습받던 첫날 강습후 샤워장에서 쓰러져 “이 힘든 것을 돈 내면서 왜 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참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교 필수 과목이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1달동안 열심히 다녀서 자유형은 어느 정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힘든 것은 변함이 없어서 1달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영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래서 대학교 필수 과목은 그럭저럭 잘 넘겼지만 다시
“살며 살아가는 행복 눈을 뜨는 것도 숨이 벅찬 것도 고된 하루가 있다는 행복을 나는 왜 몰랐을까….” 어느 날 딸이 보는 TV 앞을 지나치는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당시 신인가수 선발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으로 나오는 모습만 자주 보다가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는 그 가수의 모습을 보자, 순간 나도 몰래 터져 나오는 말이 있었다. “프로다!” 그러자 딸이 하는 말… “어, 저 노래 제목이 ‘아마추어’인데요….” 내가 그 가수를 보고 “프로다!” 하고 말한 데는 남의 노래를 듣고 평가하는 모습보다는 직접 노래하는 모습이 진정 ‘그’다워서 한 것이었는데, 그 ‘프로’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이 ‘아마추어’였다니 신기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무엇일까. 대부분 프로는 긍정적으로, 아마추어는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나는 여기서 내가 아마추어일 때의 행복을 말하고 싶다. 학교 졸업 후 꽤 오랜 외유를 하여서 동기보다 훨씬 늦게 개원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자리에서 진료한지 벌써 만 20년이 되어간다. 지금도 진료실에서는 늘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일상을 살고 있지만 진료 시간 이후에도 업무와 걱정이 많았던 개원 초기에 비하면, 연차가 쌓이면서
운동을 전체적으로 좋아하는 저희 집에서, 1982년 시작된 프로야구는 최고의 운동 경기였습니다. 개막전을 티브이로 보던 저와 형은, 개막전 홈런을 친 이만수 선수를 보고 삼성 라이온즈의 팬이 되었습니다. 물론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역전 만루 홈런을 맞고 진 것을 보고 펑펑 울면서도 MBC 청룡의 팬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후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고 아버지 따라 야구장에 가면서 응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희한하게도 경기장만 가면 라이온즈가 패해서 막 울면서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심지어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도 가서 봤네요. 유두열 선수의 홈런볼이 거의 제 옆자리에 떨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한동안 개인적인 사정으로 야구를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스포츠 신문을 통해서 경기 결과는 확인했었고, 포스트 시즌은 항상 시청하고 울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중 1990년도 시즌이 있는데 당시 삼성이 플레이오프를 5연승으로 통과한 기억이 있습니다. 제 기억엔 선동열 선수에게 김용국 선수가 홈런 친 장면이 기억나는데 정말 너무 좋아서 혼자 방에서 방방 뛰었습니다. 파죽지세로 엘지와 한국시리즈에서 붙었는데 4대0으로 졌습니다. 이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할아버지는 농부셨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농사를 짓기 싫어 도시로 나가 취업을 하고 마치 한량 처럼 지내셨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로 기억한다. 밭에서 여러 가지 나무를 가꾸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뜨거운 햇살 때문에 난 잘 찾지 않았지만 집에 동생과 있다 보면 자연스레 밭으로 나가 아버지를 찾곤 했다. 이후 아버지는 직장 관계로 밭일은 하지 않으셨지만 가끔 텃밭을 가꾸고 싶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할아버지 얘기도 함께 해주셨다. 지금은 연세가 드셔서 일을 하지 않는 아버지도 늘 얘기하셨던 텃밭. 아버지는 몇 년 전 집 근처 한적한 곳에 텃밭을 만들어 시간만 나면 밭에서 이것저것 키우시며 시간을 보내신다. 봄이면 거름을 주어야 한다. 아버지의 호출이 떨어지면 어디라도 달려가 아버지의 일손을 도와야 한다. 사실 아직 난 밭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수확물을 확인하려면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때가 되면 거름에 모종에 잡초도 뽑고 약도 쳐야 하고, 이것저것 손이 많이 가는 농사일은 나에겐 많이 버겁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거든 채소며 과일이 수확돼 밥상에 올라오면 이런 버거움은 곧 즐거움으로 변한다. 수확의 기쁨이 이런 것일까. 언젠가 아버지는 혼잣말처럼 복숭아나무는
일전에 우리나라를 알리기 위한 홍보단어로 ‘CREATIVE KOREA’란 단어를 관계기관에서 수십억 들여 만들었다 하는데 이것이 프랑스에서 먼저 사용한 CREATIVE FRANCE와 유사하다하여 표절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만든 사람은 나름대로 연구했다 하겠지만 하고 많은 단어중 하필 이런 논란에 휘말릴 단어를 선택했나 싶었다. 많은 단어 가운데 만인이 공감하며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어휘의 선택이 중요함을 일깨워 준 사건이라 하겠다. 의학에서도 우리는 목을 모가지라 하지 않고 눈을 누깔이라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동물에 쓰는 “이빨”이라는 단어를 “이”나 “치아”라는 말보다 편히 쓰진 않는다. 요즘 매스컴에 많이 나오는 치아 보장보험에 흔히들 “이를 때운다”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왜 썩은 이를 “메운다, 충전한다”는 말이 있음에도 이런 단어를 전 국민이 쓰도록 버려 두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스스럼 없이 “살이 찢어져서 병원에서 기웠어. 뼈가 모자라서 뼛가루로 땜빵했어”라는 말을 쓰는지? 요즘 치과계 산적한 일들이 많겠지만 집행부에서 이런 올바른 치과용어를 각 방송 매체에 제대로 쓰도록 요청하는 서한을 띄웠으면하는 바람으로 글을 쓴다.
3년 전 봄 저녁에 원룸 옥상에서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보니 웬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혹시나 물릴까 해서 겁을 먹고 지나쳤는데 2~3일 후에 다시 가보니 그 강아지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고 있었다는 생각에 물과 빵 몇 조각을 주었다. 강아지는 거의 일주일가량 그대로 있었고 매일 물과 먹을 것을 주었더니 주인인줄 알고 반가워했고 혼자 두고 가면 슬픈 소리를 내었다. 옥상에 계속 두기가 그래서 결국 원룸에 데려와 목욕을 시켰고,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작은 방에서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개의 종은 시츄였고 암컷이었다. 이름을 ‘쭈쭈’로 지어주었다. 개를 키워본 경험이 없어, 지금 케이블에서 방영중인 ‘개밥주는 남자’에 나오는 주병진처럼 당황하기 일쑤였고 엉망이 된 방을 치울때마다 ‘멘붕’을 경험하곤 했다. 그렇게 한 달을 같이 지내다 보니 가까워져서 이제는 가족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산책을 시키다가 우연히 강아지의 주인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쭈쭈를 강아지 주인에게 돌려 줄 수밖에 없었고, 방에 돌아와 허전한 마음에 며칠을 엉엉 울었다. 그러던 중에 인터넷 애견 카페에서 사정이 생겨 강아지를
‘이중섭 화가 탄생 백년의 신화’를 전시한다기에 주말, 덕수궁 현대미술관을 찾았다. 덕수궁 앞은 항상 외국관광객으로 붐비는 곳. 아침, 저녁 의장대의 교대식이 거창하게 진행되자 관광객들이 신기한 듯 조선 말기시절의 복장을 입고 취타소리에 맞춰 교대식을 하는 모습을 보고 탄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자주 보는 우리에게도 신선한 맛을 준다. 나도 옛날 외국여행 시 영국이나 유럽 쪽에서 그 나라의 이런 풍의 교대식을 보고 한나라의 볼거리로 만족해 보았던 추억이 있다. 외국 관광객들의 심경을 이해하기에 나는 옆쪽으로 피해주며 덕수궁 안 현대미술관을 향해 갔다. 이중섭(1916~1956)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외가가 있는 평양의 종로 보통학교를 나왔는데 오산 고등 보통학교에 재직 중인 예일대학교 출신인 미술교사 임용린의 지도하에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1936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를 거쳐 1936~1941년 문화학원에서 유학했다. 제국미술학교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로 유명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동족살생의 처참한 시기, 누구나 다 여기저기 전전해가며 목숨을 이어가던 때. 이중섭도 통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