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논어에서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 하였다. 세 명이 같이 여행을 하면 그중에 한 명은 나의 스승이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나보다 좋은 능력을 지닌 본받을 긍정적인 스승이 있다는 의미와 반대로 나쁜 모습을 보아서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자각을 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개념이 있다. 또 여러 사람이 선택한 길이 옳은 선택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TV에 1대100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1명이 100명과 퀴즈를 같이 풀면서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다른 사람들이 선택한 것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여 준다. 그런데 가끔은 대다수가 선택한 답이 틀리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수가 선택한 것이 옳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고 그와 반대되는 생각이나 선택을 하면 틀렸을 것이라는 생각과 심한 심리적인 저항을 받는다. 심지어는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딸이 졸업한 후에 무엇을 하면 좋겠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그냥 본인이 하고 싶다면 무엇을 하여도 좋다고 답변하였다. 지인은 아빠로서 조언해주거나 바라는 것이 없냐고 물어왔다. 지금 필자의 생각이 1
올해로 자가치아뼈이식재와 치아보관 사업 7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치아은행은 매우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작년 가을, 홈페이지를 리뉴얼 한 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치아보관 사업을 일반 소비자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는데 결과가 무척 좋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치아보관 문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준다. 갑자기 6년 전 처음 이 회사에 입사 했을 때가 생각난다.자가치아뼈이식재라는 용어도 생소할 뿐더러 한국치아은행이라는 이 회사로 매일같이 치아가 들어온다는 게 참 신기했던 때다.내가 처음 치과에 전화했을 때 회사이름 때문에 재미났던 반응들이 꽤 많았다. “네? 신한 은행이요?” 또는 “네? 치안은행이요?”, “네? 한국은행이요?”등 은행에서 대출 문제 등으로 전화를 한 건 아닌지 나 때문에 긴장한 원장님들도 꽤나 있을 것이다.자가치아뼈이식재란 처음 듣는 개념을 처음 접하는 원장님들을 설득하고 고정관념을 깨기란 쉽지 않았다. 하루는 종로의 어떤 치과에 들어갔는데 원장님이 “치아가 어떻게 뼈가 되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문전박대를 해 나온 적도 있었다. 나는 그때 한동안 자가치아뼈이식재에 대한 영업에 자신이 떨어졌다.
의료봉사를 시작한지 7년이 지났다. 매달 강원도 오지 마을을 찾아가고 격년으로는 해외로 나간다. 개원 11년 차인 점을 감안할 때 봉사를 다니시는 다른 분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시간이다. 하지만 기간이나 횟수가 중요하진 않은 것 같다. 단 한 번을 나가더라도 단 한 분에게 최선을 다했더라도 그 시간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특히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장애인, 노인들, 후진국 빈민들에게는 더 그러하다. 아픈 치아를 하나 뽑아줬을 뿐인데 평생 가장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는 환자를 직접 경험하고 나면 의료봉사의 유혹은 더 심해진다. 진료실에서 멱살을 잡힐 정도로 환자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현 의료실태를 감안하면 더 그렇다. 사실 봉사란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의료섬김이라는 말을 더 즐기는 편이다. 봉사란 말은 왠지 내가 뭔가를 많이 내려놓고 헌신하는 느낌이 강해서 싫다. 내 스스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서다. 하지만 진료를 할 때 환자를 섬기는 마음으로 한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 누군가에게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어찌 그러지 못해서 내가 그 사람을 섬겨야 하는 업이 생겼다고나 할까?아프리카 세네갈은 이번이 두
한겨울이 아니라 이른 봄 같은 화창한 일요일, 12월 말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포근한 날씨에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대영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이며 1753년 저명한 의사이자 학자인 한스 슬로언(1660~1753)이 평생 모은 골동품과 도서, 식물 표본 등 7만1000여점을 기증하여 초기 박물관을 설립하게 되었다.대영박물관의 소장품이 확장기를 거쳐 급속히 늘어났으며 윌리엄 해밀턴 경의 그리스 도자기(1772), 저 유명한 로제타 스톤과 고대 이집트 유물(1802), 찰스 타운의 고전 조각상(1805), 엘긴 마블로 잘 알려진 파르테논 신전 조각 (1816)들이 소장품 목록에 추가 되었다.그리고 1823년에 국왕 조지 4세가 부친의 도서관인 왕의 도서관을 국가에 기증했고 이 시기에 대영박물관은 세계 도처에 유물 발굴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이라크, 터키 등의 고고학적 발굴사업에 참여하였다.그리고 소장품이 늘어남에 따라 새 건물도 확장하여 갔고 전 세계의 문명과 문화, 역사를 한자리에 모아 놓은 세계 최대의 문명사 박물관이 되었다 한다. 그 방대한 소장품들은 일반인에 공개된 90개 이상의 전시관과 700만점이란 상상할 수 없는 방대함에 놀라움을 금치
최근에 다양해진 도서관 인문학 프로그램 중에 ‘나의 역사 쓰기’라는 것이 눈에 띄더라고요. 자신의 인생을 길게 펼쳐 연대기를 쓰기도 하고 나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찾아보기도 하고 어떠한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펼쳐보기도 한대요. 자신이 이제껏 살았던 삶의 방식을 살펴보다 보면 자기에게 흐르고 있는 내면의 힘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힘은 앞으로 살아갈 힘이 된다고 합니다. 건축가 승효상씨는 어느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가 근거없는 말이라고 얘기할 때 터무니없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터에 새겨진 무늬를 다 없애버린다, 터에 새겨진 무늬가 없다는 뜻이래요. 집을 지을 때도 그 전 땅에 있었던 모든 기억을 허물어 터무니를 없애고 새집을 짓는 것 보다 터무니의 기억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요. 그것이 지속가능한 건축이라고.우리의 역사인 삶을 들여다보는 이유도 그런 거겠지요. 터무늬의 기억을 찾는 것. 함께 나누고 픈 노래가 있습니다. bright eyes가 부르는 first day of my life.글쎄요, 당신 인생의 첫날은 언제였을까요? 그 날은 물리적, 육체적으로 세상에 태어난 첫 날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알싸한 아픔 같은
오늘은 2015년 12월 23일이다. 지난 6월 27일에 미국 아이오와에 도착해서 이틀간의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아이오와 치과대학 노인치과 클리닉에서 펠로우 직책으로 노인진료를 시작하였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5년 동안 첫 번째 유학을 하면서 갈고 닦았던 영어도 이미 13년이나 지나서 거의 다 잊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척 긴장이 되었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은 하루 종일 환자를 진료하고 화요일과 목요일은 세미나 주제를 선택하고 관련된 논문을 5개를 찾아서 패컬티와 동료 펠로우들에게 금요일 밤 12시까지 보내야 한다. 매주 수요일 밤에는 30분 정도 발표를 해야 하고 질문과 토론을 한다. 다행히 영어는 곧 회복이 되어서 환자와 소통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지만, 진료기구나 진료방식이 달라서 무척 당황하였다. 특히 수 십 년 동안 원장으로서 누구의 지시를 받는 생활을 하지 않다가 직급상 펠로우보다 상위에 있는 패컬티로부터 지시를 받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배우러 온 나의 위치를 항상 되뇌면서 지시 받는 것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환자들도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어서 진료시간은 매우 즐거웠다. 특히 환자 한 명당 진료시간을 두 시간
얼마 전 가족들과 함께 송년 분위를 좀 내기 위해서 한 식당을 찾았다. 치과에서 직원회식 때 가끔 들르던 곳인데,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연말 분위기도 낼 겸해서 기분 좋게 예약을 했다.연말이고 주말이라 미리 예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당 직원들은 매우 분주했다. 당연히 주문을 해도 기다리는 시간은 길어졌고, 뭔가 부탁을 하면 계속 반복해서 얘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반찬이 부족해 더 달라는 얘기를 적어도 네 번 이상했는데도, 식사를 다 마치고 한참 후에야 가져와서 “이제 됐다”고 말했더니 점원이 하는 대답이 걸작이었다. “더 달라고 했잖아요”라고. 물론 더 달라고 한 건 맞지만, 이미 식사는 다 마친 후 였고, 뒤 늦게 반찬을 가지고 온 것은 생각하지 않고,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바쁜데 장난을 치냐’는 식의 대답이었다.순간 그 대답에 필자도 짜증이 나서 “몇 번이나 얘기 했는데 이제 가져 온 거 아니냐”고 쏴 붙였다. 기분 좋은 가족 송년회가 일순간 험악한 분위기로 변해버렸다.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잠시나마 고민했지만, 그래도 말할 건 해야겠다는 마음에 식당 사장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어떤 직원인지 말하지는 않았는데, 식당 사장이 그 직원을 지목하면서 “하루
지난 12월 5일 함석태 개원 100주년을 보내면서 성북동 답사길에 나섰다. 이 길은 76년전(1939년) 함석태 선생이 상허 이태준家를 방문했던 길이다. “淸福反日”이라는 수필도 이곳을 다녀온 후 쓴 것이다.그분의 체취를 생각하며 우리 일행은 한성대입구역에서 만남을 시작했다. 협회사 편찬위원회 자문위원 김종열 선생님, 배광식, 이주연 편찬위원, 치의신보 안정미 부장, 협회 직원 권남학과 함께 향토사학가 이승을 선생의 도움으로 답사길을 나섰다.이승을 선생은 함각(함석태 손자)과 이웃인연으로 함석태 선생을 연구하여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찾아낸 분으로 충분한 자료 준비와 설명으로 우리의 답사길을 수월하게 해주었다.한달 전에 날을 잡았으나 공교롭게도 민노총궐기대회가 있는 날이라 마음은 불안했고 며칠 전 깜짝 추위가 있어서 걱정했는데 모든 게 순조로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우리 일행은 한성대입구역에서 만나 택시로 성북동 길을 거슬러 올라 삼청동 북악 스카이웨이로 갈라지는 삼거리 지점에서 내렸다. 근원 김용준 집부터 답사했다. 근원 김용준은 화가, 수필가로 이태준과 같은 동경유학생으로 집도 성북동 근처에 살아 절친한 사이였다. “두꺼비 연적을 산 이야기”가
제2063번째 이야기 2358호 게재끝날 것 같지 않던 무더위가 지나니 거짓말처럼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지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모든 감각이 하나둘 무뎌지는 걸 느끼며 쓸쓸한 마음으로 체념하고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데, 아직 가을을 기다리는 설렘이 남아있음에 감사드린다.어제 실버타운에 입소하신 어머님을 뵙고 왔다. 3년 전 60년을 같이 하신 아버님을 먼저 보내시고 오랜 외로움과 우울증에 시달리시던 어머님은 올해 초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실버타운입소를 결정하셨다. 남편은 수험생엄마라는 무기로 무장한 나에게 조심스럽게 같이 갈 것을 종용했다. 어머님은 89세이신데 그 당시로서는 꽤 유복하고 개화된 집안의 맏딸로 자라나 명문고와 명문대학을 나오시고 미인대회에도 출전하실 정도로 뛰어난 미인이시다. 내가 결혼할 때만해도 어머님은 건강하시고 자신감 넘치시는 모습으로 나를 이끌어주셨다.어느덧 세월이 흘러서, 어머님은 체력, 인지능력이 떨어지셔서, 혼자서는 멀리 다니지도 못하고, 작은 일처리도 힘들어하시고 많이 외로워하신다. 같이 가자는 남편의 제안에 문득 우선순위를 고민하는 내 자신에 많이 실망했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사랑하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동문 선배이자 동아리 선배님 치과에 근무의사로 들어갔다. 진료 전반에 관해서는 물론이고 치과 경영과 사회 초년생의 개인적인 어려움까지 살펴주셨다. 사모님께서 내 점심 도시락까지 보내주신 일도 빈번했다. 치과의사로 걸음마를 떼는 시기에 깊은 관심과 사랑을 주신 선배님 곁을 떠나 개원을 하고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나의 멘토 선배님은 대한치과의사합창단(이하 DENTAL CHORUS)의 창단 때인 1990년부터 단원으로 활동하셨기에 나도 덴탈코러스 정기연주회에 몇 번 관객으로 또는 후원회원으로 참석했었다. 1997년 우리치과에서 가까운 곳으로 합창단 연습장소가 옮겨왔다며 내게 입단을 권하셨다. 노래 부르는 것보다 듣기를 좋아하는 나지만 사랑하는 선배님의 권유이기에 공손히 연습실에 따라갔다. 합창연습에 참여한 첫 해에는 악보를 제대로 볼 줄도 몰랐고 마음과는 달리 노래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황홀한 미성을 가진 합창단원들의 화음을 듣는 월요일 저녁이 즐거웠다. 월요병이란 단어는 벌써 잊어버렸고 여성단원들이 챙겨주시는 맛있는 간식에도 마음을 빼앗겼다. 합창단에서 연습하던 곡이 라디오에서 나오면 무척 반가워서 흥얼
지난 여름의 어느 일요일 늦은 오후에 얼마 전 미국에서 2년 정도 공부를 하고 최근에 돌아온 대학동기를 만났습니다. 보통의 치과의사들과는 달리 선교학을 공부하고 왔으며, 평소에 긍정적이고 느긋한 사고방식에 가끔은 제가 조바심을 내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도 식사라도 함께 하고자 했으나, 치과의 정리문제가 마지막까지 여의치 않은 이유 등으로 훌쩍 떠나고 특별한 연락도 없어서 섭섭했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그런 문제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습니다. 하늘에 뜻이 있어서인지, 자기만 생각하고 쉽게 잊어버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3월에 도착한 후에 정기총회를 미루면서까지 6월에 소속분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속해 있는 경기지부에서 분회 일을 하고 있는 지인들을 수소문 하고 있던 차에 내심 반가웠습니다. 겸사겸사 요즈음 제가 관심이 있는 주제로 카톡을 보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미국생활 중에 공부한 이야기, 아이들의 교육문제, 미국에 있는 동기와 선배 이야기 등을 나누었습니다. 개인적 궁금증과 함께 치과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보통의 치과의사들이 걱정하는 최근의 치과경영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