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이 되고자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슴 속에 품게 되는 봉사 하는 삶. 치과의사가 되고자 결심하였을 때에 꿈꿨던 내 미래의 모습 중에는 봉사하는 나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의 나에 다가가고자 치의학 전문대학원 재학 중에도 봉사 동아리 활동을 하며 봉사의 즐거움을 알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치과의사가 되어 수련의로 바쁘게 생활하다보니 봉사는 어느새 먼 훗날에 할 수 있는 일로 생각하고 마음의 한 구석에 밀어 놓고 잊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양연미 교수님(전북대학교 소아치과)을 통하여 가까운 익산에서 7월 2일과 3일 양일간 ‘스마일 재단’의 봉사가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오랜만에 함께 봉사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스마일 재단’이라는 이름은 이전부터 들었던 적이 있었지만 어떤 일을 하는 단체인지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고, 소아치과 전공의로서 장애인 학회에 참가하면서 스마일재단과 나성식 이사장님 만나볼 기회가 생겨 어렴풋이 장애인 구강보건을 위하여 일하는 단체로 알게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장마의 시작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흐린 날씨였지만 치과의사가 되어 진료 봉사를 하게 되는 첫 기회에 설레는 마음으로
'당신 꿈은 무엇인가요? 인생의 목표는?’ 최근 아르바이트 직원분과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길고 가늘게 사는 게 인생 목표라 급여가 적더라도 근무 시간이 길지 않고 정년까지 다닐 수 있는 직장을 다니고 싶다”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어쩜 이렇게 꿈도 목표도 없을까 싶기도 하여 살짝 당황스럽기도, 안타깝기도 했다. 아니, 누구는 벌써 20대에 청년사업가가 되어 회사를 차렸다 하고, 누구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전문가가 되었다 하며, 또 누구는 어느 누구도 이뤄내지 못한 도전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는데, 그저 길고 가늘게 사는 게 목표라니. 이 얼마나 허망한 꿈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의 대답보다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든 것은 대답할 때 그의 당당하고 자신감 있던 표정이었다. 나는 그저 그런 삶을 택한 그가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당당하였던 것이 놀라웠고, 순간 어쩌면 이상한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였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나는 꿈 사대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무언가 거창하고 대단한 꿈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나만의 그릇된 편견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출근 길 차안에서 한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의사가 쓴 수필집에 실린 내용이 나오고 있었는데 내용을 요약하자면, 한 노부부가 병원을 찾았다. 진료가 필요한 환자는 할머니였고, 할아버지는 보호자로 내원하셨다. 하지만 유독 이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큰소리로 병원이 떠나갈 듯 이야기를 하였고,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고 한다. 진료를 보면서도 할아버지는 의사가 한 얘기를 모두 가로채 할머니에게 큰소리로 호통치듯 얘기 했으며 “꼭 약은 먹어야 하나? 얼마나 약을 먹어야 하나? 이 약을 먹으면 완치가 되나?” 하고 큰소리로 따지듯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에 기분이 상한 의사는 한 달 뒤 다시 내원한 노부부를 진료하면서, 들어오자마자 “약은 꼬박꼬박 먹었습니다”라고 얘기하는 할아버지를 무시하고, 할머니를 보며 “약은 아직도 1년 정도는 더 드셔야 돼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살짝 미소를 띄우며, 할아버지를 쳐다봤고 할아버지는 조용히 의사의 귓전에 “아내가 귀가 잘 안들립니다”라고 말하셨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할아버지는 큰소리로 “약을 1년 정도 더 먹어야 된대”라고 말씀하셨다. 진료가 끝난 후 할아버지는 의사에게 조용히 “저희 아내가 귀가 안 들리는 걸 창
'여러분~! 초절정 미성 작렬 댄스 N 발라드 가수 리안의 새 노래가 나왔어요!” “오오 축하드려요!”… “대박 기원합니다!”… “역시 언제나 멋지세요!!!”… “노래는 너무너무 좋아요! 그런데…”… “아 다 좋은데 가수가 쫌….”… “가수가…”… “가수가…”… “가수가…”… 아니 이 사람들이 진짜, 내 목소리가 어디가 어때서 자꾸 가수가 문제라는 거지? 음정 좋아, 박자 좋아, 감정 좋아, 게다가 내가 나름 싱어송라이터잖아? 가사 좋아, 멜로디 좋아, 반주 좋아, 게다가 내가 또 나름 괜찮게 생겼잖아? 눈도 두 개, 귀도 두 개, 이빨도 스물 몇 개, 아니 도대체 가수가 뭐가 문제라는 거냐고… 응? 응? 이것 참, 갈수록 삐딱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네. 뭔가 본때를 보여줘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지? 보란 듯이 빌보드 챠트 1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그놈의 가수 자질 논란 따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을 텐데 이게 당최 쉽지가 않네. 오또카지, 오또카지, 오또카지… 아, 맞다! 돌아갈 길이 없다면 정면돌파하는 거지! 그래, 그럼 내 노래를 다른 가수들에게 부르게 해보자. 그것도 노래를 아주 아주 잘 부르는 친구들에게. 그러면 모두들 똑똑히 알 수 있게 되겠지
지방 작은 동네에서 슬픈 哭聲이 들려왔습니다. 한 청년이 취업에 대한 고통 때문에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는데, 마침 퇴근하던 군청의 한 공무원과 부딪혀 둘 다 사망한 사건입니다. 그 공무원은 어린 아들과 출산을 앞둔 만삭의 아내가 있는 젊은 가장이었기에 더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마른하늘에서 날벼락 맞을 확률이 높을까요? 투신하는 사람과 부딪혀 생명을 잃을 가능성이 더 많을까요? 세상은 투신자살한 그 대학생과 사망한 공무원과의 묘한 악연을 탓하며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허나 어찌보면 그 젊은이 또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얼마나 컸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자살한 청년의 남은 가족들은 또 가족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남의 가정에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생각으로 얼마나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까요. 그가 고의적으로 한 일은 아니지만 결과는 너무나 비극적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어떤 악의 힘이 작용하여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 공무원의 장례식장에서 투신한 대학생의 유가족들이 공무원의 유가족들에게 무릎 꿇어 사죄했고 공무원의 유가족들은 사죄를 하는 유가족들을 일으켜 세우며
내 어릴 적부터의 꿈은 의사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제 이 두 꿈이 다 이루어졌으니 진정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기쁘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린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삭스다.’ 헤르만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글이다. 나는 알을 깨고 나와야 했다. 그동안 의학(醫學)과 이과(理科)의 세계에 살아왔던 내가 그 세계를 탈피하여 새로운 문학의 세계로 태어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시의 세계로 날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내 작은 글쓰기는 내 허물을 벗는 일, 알 껍질을 부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어 준 것 같다. 이제 비로소 나는 글을 쓰며, 더불어 나누고픈 작은 몸짓을 할 때마다 나는 머리를 조금 더 높이, 좀 더 자유롭게 치켜들어, 아름다운 맹금의 머리를, 산산이 부수어진 세계의 껍데기 밖으로 쑥 내민 것 같은 느낌이다. 가슴이 따뜻한 시인이 되고 싶다. 내 시를 즐겁게 읽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를 위해 아름다운 시를 쓸 것이다. 줄탁동시(啐啄同時) 알속에 있는 병아리가 알을 깨기 위해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농촌에 대한 기억들뿐이다.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서울시 구로구 천왕동 인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지금의 천왕동은 고층 아파트와 지하철역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주거지역이지만 70년대 중 후반까지도 그 곳은 완전한 농촌지역이었다. 하루에 몇 번 없던 버스도 족히 이삼십분은 걸어나가야 이용할 수 있었다. 주위에는 산과 들 뿐이었고 딱히 재미있을 거리는 없었다. 누구나 지루하게 살았음직한 그런 시골동네가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기억의 장소가 되었다. 거의 40년 전 그 때의 그 장소로 나를 잠시 옮겨서 잊지 못할 기억들을 몇 가지 써보려 한다. 이 이야기는 마을사람들을 온통 분노와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나의 악행(?)에 대한 이야기 이면서 부모님께 드리는 반성문이기도 하다. 유리는 깨지는 물건이고 빗자루는 용도가 다양하다 때는 바야흐로 새마을운동의 시기, 아마도 여름이었던 것 같다. 모든 마을 사람들은 도랑을 넓혀서 관계수로를 확보하고 우물을 정비하고 토담을 이룬 초가집을 계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연히 나의 부모님들도 다른 분들과 함께 마을 바꾸기에 여념이 없었을 터였다. 혼자 남은 무료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는 세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먼저 하늘에 오로라가 떠야 하고, 오로라를 가리는 장애물(구름)이 없어야 하며, 그 장소에 내가 있어야 한다.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장소에 가는 일이야 해당 장소로 여행을 가면 되겠지만 현지인이 아니고서야 기상상황이나 그날 그날의 오로라 발생 여부는 여행계획을 세우는 몇 달전에 예측할 수도 없을뿐더러, 게다가 여행일정에 제한이 있는 개업의로서는 거의 운에 맡겨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머물기로 한 핀란드의 4박중에서 일기예보상 맑은 날은 첫날 뿐이었는데 아주 희미한 오로라만이 떠올랐고, 둘째날은 밤새 비가 내렸다. 새벽에 비가 그쳤길래 동트기전에 나가봤지만 오로라는 감감무소식. 셋째날과 넷째날의 날씨는 일기예보상 흐림이었다. 게다가 마지막 날은 눈이 내린다는 예보마저 있었다. 하지만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는 핀란드에서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고, 구름이 가득하긴 했지만 하염없이 오로라가 뜰만한 방향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기를 두시간여. 갑자기 저 멀리서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그리고 나서는 두껍게 드리운 구름을 뚫고 오로라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행 3일차에 비록 구름
구강외과 의사와 당직은 뗄 수 없는 사이다. 매일 밤 부산 경남 시내의 곳곳에서는 생각도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상상도 못할 이유로 다쳐서 응급실을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몽롱하고 희뿌연, 그러나 때로는 숨넘어가도록 급박한 병원의 밤을 당직의는 지켜야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양산 시내에 공단이 많아서일까. 유달리 작업 중 발생한 사고로 골절상을 입어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많았다. 쇠파이프에 얼굴을 부딪혀 하악골이 골절된 아저씨, 삽량축제를 위한 준비 작업 중 사다리에서 떨어져 상악골이 골절된 아줌마, 작업장에서 거대한 쇠사슬이 안면부를 정면으로 강타하여 상하악골 복합 골절상을 입은 21살 청년 등 실로 다양한 이유로 다친 다양한 환자들을 보아왔다. 먹고 살기 위하여 고령의 나이에도 일터에 나아가 작업을 하시다 다쳐서 오시는 분들을 볼 때면 그들을 덮치고 있는 삶의 무게가, 사회의 각박함이 느껴져 마음 한 켠이 먹먹해온다. 2015년 6월 29일. 한평생 잊을 수 없는 밤이다. 2년차로 신분상승(?)이 이루어져 Back duty였던 날이었다. 1년차 당직의의 전화를 받았다. 작업 도중 낙하하는 돌에 얼굴을 다쳐 출혈이 지속되는 환자에 대한 보고였다
맷돌은 돌로 아래짝 위짝을 같은 크기로 만들어 아래짝 한 가운데에는 수쇠, 위짝에는 암쇠를 끼워 매를 돌릴 때 벗어나지 않게 하고 곡식이나 콩 등을 타거나 갈아서 다른 재료를 만드는 연장이다. 맷돌의 모양새는 우선 윗돌과 아랫돌로 되어 있는데 윗돌에는 망밥을 넣을 수 있게 구멍이 나 있고 옆구리에는 망손, 매손, 어이, 어처구니라고 하는 손잡이가 있고 가운데는 암쇠가 있어 아래짝 수쇠와 맞물리게 되어 있다. 아래짝은 가운데 수쇠가 있고 바닥은 곡물이나 망밥이 잘 타지거나 연마가 잘 되게 매조가 처져있다. 맷돌은 BC 1500~3000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사용됐다고 하며 우리나라는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맷돌의 이름도 다양하다. 과거에는 매, 매돌(재물보), 맷돌, 물명고, 물보(농가월령가), 차마(車磨), 연애(碾磑), 애(磑), 마(磨)(훈몽자회), 마석(磨石)(훙몽자치), 석마(石磨)(해동농서)로 불리었다. 또 지방에 따라 방언으로 가래(제주), 동매(예산), 망(함북, 함남, 평남), 망똘(황해도), 매뚝(전남, 전북), 매(전남, 충남) 등등으로 불리여 왔다. 어처구니없는 맷돌을 생각해 보자. 원래 ‘어처구니’는 명사로 상상 밖의 엄청나게 큰
우리 집 아이는 2012년 2월생으로, 우리나라 나이로 5살이다. 요즘은 낮에는 유치원에 갔다가 3시경에 집에 와서 엄마나 할머니와 논다. 조심성이 지나치게 많은 성격이어서 지금까지는 다행히 큰 사고 한 번 없이 잘 지내왔는데, 5살이 돼서부터는 활동량이 많아지고 위험해 보이는 행동도 부쩍 많이 한다. 그래서 항상 조심조심하게 되고, 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보면, 정말 크나큰 행복의 시간이었고 동시에 나를 돌아보는 기회를 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처음 아이를 만났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불안하기만 했는데,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나하나 무사히 지나가고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를 보면 나도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는다. 요즘 들어 아이에게 부쩍 잔소리가 많아졌는데, 이런 나를 보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을 많이 하고, 까다로운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일과 관련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나는 진료를 완벽하게 잘 하려고 그렇겠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일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