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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수필>제889번째 이야기
엄마의 런닝구

경북 경산 부림 초등학교 6학년 배한권 작은 누나가 엄마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만하게 뚫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하게 뚫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 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 한다 한다. 엄마는 새걸로 갈아 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대지비(대접) 런닝구, 혹자는 난닝구라고 부르기도 했던.... 요즘은 언더웨어라는 좀더 고급스런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요즘 신세대는 별로 즐겨 입지 않는 것 같습니다. 허나 우리 때만 해도 다 찢어진 런닝구일 망정 꼭 입어야 되는 걸로 알고 있었죠. 1987년 작품이라는데 시골이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내가 자라던 1970년대 하고 정서가 같아서 슬며시 웃음이 납니다. 남편의 심정과 아내의 심정이 아이를 통해 고스란히 배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런닝구를 쭉쭉 찢는 아버지의 어긋장도 그 찢는 힘만큼의 마음만큼이나 소중해 보이고 두 번 더 입을 수 있다는 엄마의 항변은 그 아줌마의 두루뭉실할 허릿살 만큼이나 귀엽기조차 합니다. 뭐 지금이야 맞춤 속옷이니, 프랑스 산 레이스니 하지만 우리 자랄 때야 쌍방울이나 백양 메리야쓰 시절 아니었던가요? 저도 구멍난 런닝구에 얽힌 사연이 하나 있습니다. 중학교 시절 뭐 그다지 어렵게 살지는 않았지만 대동아전쟁과 육이오(그 분들의 용어로)를 겪은 세대답게 어머니는 작은 거를 아끼는 것에 꽤 집착하셨고 덕분에 내 속옷들도 별로 성한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체육시간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려고 윗도리를 벗자 내 뒤에 있던 친구 놈 하나가 하는 말이 “야 호선아, 너 기관총 맞았냐?” 무슨 소리인가 하고 런닝구를 벗어 보니 등짝에 난 여러 개의 구멍이 주위에 말라붙은 피를 묻힌 채 뚫려 있어 그 놈 말처럼 정말 기관총을 맞은 듯 싶더라고요. 말라붙은 피의 정체는 무어냐고요? 사춘기를 맞아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 저는 얼굴에는 그냥 볼만하게 꽃이 피는데 이상하게 등짝에는 거의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여드름이 났었습니다. 심심할 때마다 닿는 만큼 손을 등뒤로 넣어 여드름을 짜는 게 중요한 일과 중에 하나였고 요즘처럼 크리넥스니 물휴지 같은 게 있으리 만무했던 저는 그냥 런닝구에다 대고 짰었고 그 흔적이 마침 뚫려 있던 구멍과 어울러져 그런 효과를 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위생관념을 가지고 살던 놈이 지금 치과의사를 한다고 하니 참.... 자식 놈 보라고 사준 동시집을 들쳐 보다가 예전 기억이 나서 끄적거려 보았습니다. 사소한 일상이 눈물겹고, 애틋해 지는 것 역시 나이 먹어 가는 중년의 고단한 감정인 것 같습니다. 이호선 / 충북 진천 조이치과 원장